190page

- 190 - 김면(金沔) 장군 휘하에서 창의(倡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1차 무계전 투(茂溪戰鬪)에 고령대장(高靈代將)으로 참가한 정상례(鄭尙禮)와 함께 각종 전 투에 참전(參戰)하여 그후 임진왜란의 전공(戰功)으로 정3품 무관 품계인 절충 장군(折衝將軍)을 제수(除授)받았던 것으로 병신보(丙申譜)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기축4월일증광용호방목(己丑四月日增廣龍虎榜目), 조선왕조실록(선 조실록), 농산세헌(農山世獻) 유사(遺事),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 (丙申譜 : 2016년) ●이춘형(李春亨)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여상(汝常)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증직(贈職 ) 받은 모헌(慕軒) 희관(希寬)과 증(贈) 정부인(貞夫人) 김해송씨(金海宋氏) 사이 에서 둘째 아들로 중종 36년(1541년) 10월 8일 합천(陜川) 소사리(所沙里) 자 질 본제(本第)에서 태어 나셨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공을 비롯한 형 운(雲), 동생 수(需) 등 12종숙질(從叔姪)이 가동(家僮 ) 100여인을 거느리고 같은 해 5월 10일 합천군 가야면 숭산동 소학당(小學堂 ) 에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창의기병(倡義起兵)하자 의병(義兵)으로 지 원하여 동참하였다. 송암(松菴) 김면(金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망우당 (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 영남 3대 의병장 진중(陣中)에서 계획을 돕고 군사 (軍事) 상(上)의 기밀(機密)을 여러 번 세웠으며 무계(茂溪), 성주(星州), 지례 (知禮), 개령(開寧) 등 전투에 공의 아들 영숙(永淑)과 권솔(眷率)들과 종군(從 軍)하여 외적을 격퇴시킨 전공이 지대하였다. 난리가 이미 평정(平靖)되고 공 이 돌아와서 초옥(草屋)에 누워 거문고와 글로써 스스로 즐기며 입으로만 임진 왜란 때의 수고하였음을 말하지 아니하고(.口不道平吳之勞) 다시는 세상에 뜻 을 두지 아니하였으며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의 하면 고령 수곡(藪谷)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합천에서 고령으로 입향할 때에는 반운리와 양전리 사이의 양전구역에 입향하였다고 하여 성산이 씨 고령 양전파(良田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선조 33년(1600년) 9월 18일 졸(卒)하시고 묘는 고령군 임천면(林泉面) 구유천(舊鍮泉) 현재 평지리 정곡(井 谷) 술좌(戌坐)에 있으며 홍와(弘窩) 두훈(斗勳)이 행장(行狀)을 짓고 회당(晦 堂) 장석영(張錫英)이 묘갈명(墓碣銘)응 지었다 배위는 진사(進士) 의제(義濟)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