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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 - 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아버지 형(衡)과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병진(丙辰) 명종 11년 (1556년)에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에서 태어났다. 공의 가문은 9대조 헌(憲)이 고려 충렬 왕 때 여진(女眞)을 섬멸(殲滅)한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7대조 안동장군(安東 將軍) 미숭(美崇)이 여말(麗末)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획책(劃策)한 이성계(李成 桂)에 맞서 미숭산(美崇山)을 최후 항전지(抗戰地)로 하여 고려부흥운동(高麗復 興運動)을 하다가 순사(殉死)하였던 명망(名望)있는 충효가문(忠孝家門)이다 . 어려서부터 유학에 힘을 쏟는 한편 병서(兵書)를 읽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무장(武將)으로서 자질을 갖추었다. 34세가 되자 선조(宣祖) 22년(1589) 4월 실시된 기축(己丑) 무과 (武科) 증광시(增廣試)에 동향(同鄕)이며 동방(同榜)인 진양인(晋陽人) 정상례(鄭尙禮)와 함께 급제(及第)하였다. 선조 25년 6월 28일 조선왕조실록 27권의 선조실록에 의하면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 度使) 조대곤(曺大坤)이 고령에서 왜적을 무찌른 일을 아뢰었던 내용이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 조대곤(曺大坤)이 치계하였다. 5월 23일에 적은 무리의 왜적 들이 고령현(高靈縣) 풍곡리(楓谷里)에 침입했는데, 박경록(朴景祿)·김응겸(金應 謙)·정상례(鄭尙禮)·손호(孫浩)·이천령(李千齡)·최경립(崔景立) 등이 먼저 왜적 4 ∼5명을 쏘니 적이 퇴주(退走)하거늘 훈련 봉사(訓鍊奉事) 홍걸(洪傑)이 돌진하 여 그들을 베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송암(金松庵)이 열읍(列邑)에 통 문을 보내 기병 유사(起兵有司)를 정하는 등 정식으로 기병(起兵)한 것은 정경 운(鄭慶雲)이 쓴 고대일록(孤臺日錄)에 의하면 1592년 5월 22일이었다. 따라서 풍곡리전투(楓谷里戰鬪)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볼 때 임난(壬亂) 발발시(勃發時 ) 고령현(高靈縣) 최초의 전투이다. 풍곡리전투(楓谷里戰鬪)의 승패는 향후 거주 지 단위로 전개된 의병활동(義兵活動)의 사기(士氣)를 진작(振作)시키고 의병 (義兵)의 모병(募兵)과 유지(維持)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된다 . 왜군과의 최초 접전(接戰)인 풍곡리(楓谷里) 전투의 승전(勝戰)으로 인하여 6월 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의병활동에 적극적으 로 전개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짧은시간에 많은 의병을 모병(募兵)함에 있어 적지 않는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고령지역에서 창의(倡義)한 의병도대장 (義兵都大將) 김면(金沔)의 송암선생유고(松菴先生遺稿권지이(卷之二) 보유(補 遺)에 수록된 임난창의시동고록(壬辰倡義時同苦錄)에는 공과 동방급제(同榜及 第)한 정상례(鄭尙禮)와 함께 이름이 누락되어 있었으나 각종 자료를 수집하던 중 진양정씨(晋陽鄭氏) 거창문중(居昌門中)에서 보관하고 있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인 ‛농산세헌(農山世獻) 유사(遺事)’에 수록되어 있는 송암김선생면창의제 현록(松菴金先生沔倡義諸賢錄)에 등재된 170명 중에 두 분의 이름이 기록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