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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 - (文章家)이었으며 조부 헌(憲)은 여진(女眞)을 정벌(征伐)한 훈공(勳功)으로 금 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올랐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 상(氣像)이 헌칠하고 여력(膂力)이 뛰어났으며 항상 충절(忠節)과 의리(義理)에 관한 언행(言行)을 일삼았으며 경학(經學)을 전수(傳受)받았는데 백가제서(百家 諸書)에 해박(該博)하지 않음이 없었고 특히 병법(兵法)에 뛰어났다. 선생께서 는 공이 재주와 용기를 겸비(兼備)한 것을 기이(奇異)하게 여겨 경학을 가르치 면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국가에 할 일이 많으니 이 시대에 세상을 구제할 사 람은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릇이 큰 사람은 반드시 유교의 경서(經 書)를 토대로 한 통치력(統治力)인 경술(經術)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니 모름지 기 노력하시라” 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왕에게 천거(薦擧)하여 여러 관 직을 거쳐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올라 삭방도(朔方道 : 함경도 이남과 강원도 북부지방)를 지키는 중임(重任)을 맡아 매우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우왕 14년(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정변(政變)을 일으킨 이성계(李成桂 ) 가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와 무인세력(武人勢力)을 규합(糾合)한 후 조선왕조 (朝鮮王朝)를 세울 것을 획책(劃策)하고 1392년 4월 4일 선죽교(善竹橋)에서 스승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참살(慘殺)하고 조선을 건국하려 하 자 그 불의(不義)함을 꾸짖고 평안도(平安道) 지방을 관할하던 진서장군(鎭西將 軍) 최신(崔信)과 함께 “충의군(忠義軍)”이라 명명(命名)하고 2,000여명의 군사 를 일으켰다.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의 니산(尼山 : 현재 노성산)에서 이성계군 과 최초로 일전(一戰)을 하였으나 패하고 김천시 구성면 흥평 2리의 덕대산(德 大山) 산성(山城), 성주군 가천면의 독용산성(禿用山城)과 고령군 운수면 월산 리의 운라산성(雲羅山城)에서 계속 항전(抗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퇴(敗退)하고 상원산(上元山)을 최후(最後) 항전(抗戰)의 보루(堡壘)로 정하고 입성(入城)하여 축성(築城)하고 군사를 조련(調練)하면서 여조회복(麗朝回復)의 계책(計策)을 세웠으나 1392년 7월 16일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혁명(易姓革命 ) 에 성공하여 개경(開京)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건국(朝鮮建國)을 선포하자 울분(鬱憤)을 참으며 하늘의 뜻(天意)이 다함을 알고 미숭산성내에 있는 자정 암(自靖巖)에 올라 여조광복(麗朝光復)의 실패(失敗)에 대하여 입을 다물며 자 정(自靖)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뜻의 “아액금대(我厄唫臺)”란 글씨를 암반(巖盤 ) 에 새기고 잔병(殘兵) 1천여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生業)에 종사할 것을 호소하면서 거사(擧事)를 포기(抛棄)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등극 (登極)한 후 사람을 보내어 누차 설득 및 회유하였으나 끝내 불복하고 1392년 음력 10월 10일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하여 절벽에 몸을 던져 자진(自盡)하였 다. 후인(後人)들이 공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경모(景慕)하여 휘(諱)로 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