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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 - 다. 묘는 고령 북내곡 내상동촌후(內上洞村後) 청룡 간좌(艮坐)에 있으며 방후 손(傍後孫) 헌주(憲柱)가 묘갈명(墓碣銘)을 찬하였다. 배위는 어모장군(禦侮將 軍) 림(琳)의 딸인 공인(恭人) 강양정씨(江陽鄭氏)이며 묘는 공의 묘아래 간좌 (艮坐)에 있다. 註)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자기(子期):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鍾子期)는 음조를 잘 이해했다. 백아는 종자기가 죽 은 뒤에 자기의 음조를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 다. 일반적으로 지기(知己)의 벗을 잃은 슬픔을 말한다. 참고문헌 : 성산이씨 세보戊子譜 : 2004년), 송암선생유고(松菴先生遺稿) 등 ●이득춘(李得春)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조선시대 빈객(賓客)의 연향(宴饗)과 종실(宗室) 및 재 신(宰臣)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인 예빈시(禮賓 寺) 참봉(參奉)을 지낸 언함(彦涵)과 진사(進士) 탕우(湯佑)의 딸인 파평윤씨(坡 平尹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성 격(性格)과 도량(度量)이 엄격하고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뛰어나게 크고 씩 씩하고 훌륭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 진중(陣中)에 나아가서 존재(存齋) 곽준(郭遵), 모계(茅溪) 문위(文褘), 학암(鶴巖) 박정번(朴 廷璠) 등과 함께 적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서로 충의(忠義)와 용맹(勇猛)을 다하 였다. 공은 자기의 가산(家産)을 모두 의병(義兵)의 군량미(軍糧米)로 헌납(獻 納)하고 방략(方略)과 계획(計劃)을 논의하여 도와 무계(茂溪), 정진(鼎津)전투 등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여러 번 은혜를 입고 모범이 될 만한 본보기로 장려 되었다. 선무원종삼등공신(宣武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관직은 첨 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평정(平靖)된 후 고령향안 (高靈鄕案)을 제일(第一) 먼저 창설(創設)하여 선비의 기풍(氣風)을 바로 잡았 다.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의 임계별록(壬癸別錄)에 의하면 “선조 26년 (1593년) 계사년에 곽가수(郭假守) 율() 이내장(李內將) 대기(大期) 등이 송암 (松菴) 김면(金沔) 도대장(都大將)을 고령 아림(娥林) 진중(陣中)으로 찾아가서 뵙고 공을 비롯하여 이홍우(李弘宇), 배응곤(裵應坤), 전영기(全永期) 등과 함께 기밀(機密)을 요하는 군무(軍務)를 모의(謀議)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당시 공의 행적(行蹟)을 가히 상고(詳考)할 수 있다. 둘째 아들 동길(東吉)도 공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