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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 - 공의 전공(戰功)을 기려 “충효문(忠孝文)”을 하사받았으나, 6.25전쟁으로 인한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었다. 공의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산74번지 해좌(亥坐)에 있으며 사재감(司宰監) 참봉(參奉)을 지낸 유경민(兪景敏)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기계유씨(杞溪兪氏)와 합폄(合窆)으로 모셔져 있으며 묘갈명(墓 碣銘)의 비문(碑文)은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이 근찬(謹撰)하였고 1919년 사민(四敏)이 세운 비를 1971년 대호(大浩)가 중건(重建)하였다. 후손들은 공의 전공(戰功)과 유덕(遺德)를 기리기 위하여 1958년 고령군청내에 있는 향사대 (鄕射臺)를 매입(買入) 및 파철(破撤)하여 대가야읍 중화리(中化里) 435번지에 명곡정(明谷亭)를 세웠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을 기(期)하여 반곡재(盤谷齋 ) 에서 향사(享祀)를 드린다. 참고문헌 : 연조귀감(掾曹龜鑑), 대동문약록, 고령지(高靈誌), 교남과접록부록권 일(선조조), 율산유고(栗山遺稿), 고령의 충효의열록 ●이동길(李東吉)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경원(景元)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전공으로 선무원종삼등공신(宣武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 府事)에 이르렀던 득춘(得春)이며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공은 기개 (氣槪)와 도량(度量)과 재지(才智)가 출중(出衆)하여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었 다. 임진왜란 때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이 앞장서서 창의(倡義)하자 공은 아버지를 배행(陪行)하여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을 배견(拜見)하니 공을 보 고 재지(才智)가 뛰어나다고 말하고는 군관(軍官)으로 삼았다. 김산(金山), 개령 (開寧), 하노(賀老), 죽현(竹峴) 등지의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웠다. 선조 2 7 년(1594년) 갑오년에 실시된 무과별시(武科別試)에서 급제한 후 진위장군(振威 將軍) 행(行)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제수(除授)하고 포상(褒賞)을 하였다 . 어모장군(禦侮將軍) 류여백(柳如栢)이 지은 공의 만시(輓詩)에 鼓鳴司馬走(고명사마주) 북을 울리면서 사마(司馬 : 군정(軍政)을 맡아보았던 벼슬)가 떠나가니 琴斷子期亡(금단자기망)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자기(子期)가 죽었네 라고 하였다. 공이 군정(軍政)을 맡으면서 도리와 책임을 다하였음을 애도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