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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 - 勇)을 칭찬하기를 아끼지 않았으며 아장(亞將)으로 삼고 작전계획(作戰計劃)을 수립하여 상호 논의(論議)하는 군무(軍務)인 찬획(贊劃) 업무를 관장하는 작전 참모(作戰參謀) 역활을 수행한 것으로 연조귀감(掾曹龜鑑)에 기록되어 있다. 거 창으로 이동하는 적의 대군을 맞아 진주(晋州), 단성(丹城 : 현재 산청 지역) , 삼가(三嘉) 둥지에서 치른 복병전(伏兵戰)에서 많은 전과(戰果)를 걷어 조정의 은전(恩典)을 입었다.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주청(奏請)으로 “먼저 향리(鄕吏 ) 를 면한다(先以免鄕)”는 왕명(王命)이 내려져 고려시대 잠영세족가문(簪纓世族 家門)의 명예(名譽)를 되찿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정조 1년(1777년 ) 이진흥(李震興)이 지은 연조귀감(掾曹龜鑑)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거창(居昌 ) 의 우척현전투(牛脊峴戰鬪)에서 불리한 지형(地形)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략 전술(戰略戰術)로 왜적(倭敵)의 예봉(銳鋒)을 꺾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발에 부상(負傷)을 당하니 조정에서 두 번째의 포상(褒賞)으로 정5품의 낭관(郎官 ) 벼슬을 내려 그 전공(戰功)을 치하(致賀)헀다. 이와 같이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전세(戰勢)가 승기(勝機)를 굳혀 갈 무렵에 남강(南江)과 낙동강(洛東江)의 합류 지점(合流地點)에서 기강전투(岐江戰鬪)가 일어났다. 김해(金海)에 주둔한 왜적 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창녕(昌寧)과 초계(草溪) 등지로 이동하는 것을 공격 하라는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의병장(義兵將) 이대기(李大期)와 합세(合勢)한 후 팔계(八溪 : 합천군 초계)의 창진(蒼津)에서 대적(對敵)하게 되 었다. 세찬 바람이 일어 모래가 날고 나뭇가지가 꺾이는 악천후(惡天候) 속에 서 왜선(倭船)을 수장(水葬)시켰는데, 한 왜장(倭將)이 육지(陸地)로 달아나는지 라 공이 칼을 빼어 들고 육박(肉薄)하니 어디선가 유탄(流彈)이 날아와 공의 머리를 맞히었다. 진중(陣中)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이었다. 그 용맹(勇猛 ) 과 기개(氣槪)는 오히려 살아 눈은 왜적을 행해 부릅뜬 채였다. 왜적이 물러난 후 정기룡(鄭起龍) 장군은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문 채 손수 시신(屍身)을 염습(殮襲)하여 군현(郡縣)으로 하여금 고향 집으로 모시게 하였다. 그리고 지 체 없이 그 전공(戰功)을 조정(朝廷)에 상주(上奏)하여 수문장겸사복시정(守門 將兼司僕寺正)으로 증직(贈職)하여 세 번째 포상(褒賞)을 하였다. 또한 경상우 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鄭起龍)의 주선(周旋)으로 군례(軍禮)에 따라 장사(葬 事)하였다. 공은 사패지(賜牌地)로 고령군(高靈君) 대가야읍 중화리의 감나무골 (柿木谷)에서 메봉고개(馬峰峴)까지를 경계로 하는 임야(林野) 육겸두(六鎌頭 ) 를 하사(下賜)받았으며 3년간의 제수미(祭需米)를 받아 치제(致祭)하였다. 공의 묘소가 있는 산의 본명(本名)은 진전(榛田 : 개암나무산)이었으나 사패지(賜牌 地)로 임야(林野)를 하사(下賜)받아 이곳에 공을 안장(安葬)한 후에는 후인(後 人)이 시명곡산(時明谷山 : 때밝골산)이라 불렀다. 선조 36년(1603년) 1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