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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 - 노라”하였다 라고 읊었다. 이때부터 다시 한강(漢江)을 건너지 않았으므로 후 인(後人)들은 그 낚시하던 곳을 용담어은동(龍潭漁隱洞)이라 하였고 용담(龍潭 ) 위에 밭 한띠 전이 있었는데 세상사람들은 ‘송돈(宋墩)’이라 일컬었다. 향년 7 7 세로 여생을 마치니 세종 14년(1432년) 12월 7일이었다. 묘는 고령군 하동방 (下洞坊) 상가야곡(上伽倻谷) 해좌(亥坐)이며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고흥유 씨(高興柳氏)는 동원(同原) 쌍분(雙墳)이다. 전남 고흥군 운곡사(雲谷祠)와 장성 군 경현사(景賢祠), 개성 두문사(杜門祠)에서 제사를 드린다. 연안(延安) 이득수 (李得秀)가 찬장(撰狀)하고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찬갈(撰碣)하고 전승지 (前承旨) 김영한(金甯漢)이 찬신도비(撰神道碑)가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에 세워 져 있다. 참고문헌 : 남양송씨구은공파 파보, 고려문하시중남양송선생신도비 등 ●이경령(李景齡)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인로(仁老)이며 호는 의암(義巖)이다. 효행(孝行 ) 이 남달랐던 처사(處士) 장(璋)의 둘째 아들로 중종 26년(1541년)에 고령군 대 가야읍 헌문리에서 태어났다. 그 상조(上祖)는 붓 한 자루로 민족의지(民族意 志)를 일깨우고 수십만의 몽고군(蒙古軍)을 철병(撤兵)케 하였던 고려 최고의 문장가(文章家)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이며 7대조는 고려광복(高麗 光復)을 위하여 항전(抗戰)하다가 순절(殉節)하여 천추(千秋)에 길이 빛나는 의 열(義烈)의 표상(表象)인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이다. 소년시절부터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고 용력(勇力)이 출중(出衆)했으며 무예(武藝)를 익혀 그 솜씨가 비범(非凡)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분(義憤 ) 을 참지 못하고 향병(鄕兵)을 모집한 후 경상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 조경(趙 儆) 휘하에서 돌격장(突擊將) 으로 활약하던 정기룡(鄭起龍)의 군진(軍陣)으로 달려가 관군(官軍)이 되었다.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탁계(濯溪) 전치원(全 致遠),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등 창의군(倡義軍)과 긴밀한 협조를 이루면 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제1차 진주성전투(晋州城戰鬪), 사천(泗川), 단 성(丹城) 등 각종 전투에 참전(參戰)하여 소수(少數)의 정예(精銳) 병력(兵力)을 이끌고 지형(地形)을 이용한 매복전술(埋伏戰術)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 공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진주(晋州) 아동령(峨東嶺) 싸 움에서 병사를 인솔하고 매복전술(埋伏戰術)로서 활을 쏘아 크게 전공(戰功)을 세우니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군주(軍酒)를 권하며 공의 용맹스러운 무용(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