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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 - 에 4세 유허비(遺墟碑)를 근립(謹立)하였다. 배위는 현감(縣監) 재중(載中)의 딸 인 정부인(貞夫人) 덕산황씨(德山黃氏)로 합폄(合窆)이다. 공은 고령군 덕곡면 노2리 명곡(明谷) 또는 서우재에 터를 잡은 성산배씨(星山裵氏)의 입향조(入鄕 祖)가 되신다. 참고적으로 서우재의 마을이름은 서유재(鼠留在)에서 유래했다 .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먼 옛날 마을에 불행한 일이 자주 생겼는데, “코끼리 코의 형상을 하고 있는 마을 앞산의 기운을 줄이 기 위해 마을이름을 쥐가 들어간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는 노승(老僧)의 말에 따라 마을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고, 그 후 불행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명곡(明谷)이다. ‘날이 새는 골짜 기’라는 뜻이다. 참고문헌 : 임난시창의동고록, 성산배씨 진사공 휘 현(俔) 파보(계유보) 연려술기술. ●송인(宋寅)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행정(杏亭) 또는 송촌(松村)이다. 은청광록대부(銀 靑光祿大夫)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침(琛)의 아들로 지정(至正 : 원나라 순제 연호) 공민왕 5년(1356년) 병신(丙申) 2월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공 민왕 23년(1374년)에 동진사(同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 ) 을 두루 지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 이숭인(李崇仁) 등 삼은(三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였으며 판도판서(版圖 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태조 이성계 가 등극하자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면서 항절불굴(抗節不屈)하 여 기우자집(騎牛子集)과 신독재집(愼獨齋集)에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 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고령(高靈) 송림촌(松林村)으로 옮겨 은둔(隱遯)하면 서 은행을 심고 정자를 지어 행정(杏亭) 또는 송촌(松村)이라 자호(自號)하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남쪽으로 와보니 좋은 가정(家亭) 없기 에 은행나무 심고 정자지어 행정(杏亭)이라 불렀네, 고려 백성 지금 홀로 남아 있으니 천만년 소나무와 잣나무는 꿈속에 푸르구나”라고 나타내었다. 태종 때 에 누차 초빙하였으나 공은 지조를 지키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날마다 고기 낚시하여 자신을 즐기면서 용담어구(龍潭漁謳)를 남겼으니 이르기를 “ 작은 배 한가롭게 돌아오고 눈보라 휘날린 날 낚싯대 둘러맨 어부 때를 잃고 한가롭다 . 그대 생전 어디 있었는가 묻고자 하니 강에는 쏘가리 있고 산에는 고사리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