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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 - (松庵) 김면(金沔)의 거창(居昌) 우마현(牛馬峴) 방어전(防禦戰)에도 협력하여 왜병의 침입을 막아 강우일대(江右一帶)가 안온(安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후 개산포(開山浦) 전투, 무계(茂溪) 전투의 준비에서 승리까지 공훈(功勳)이 인정되어 1594년 10월 10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천거(薦擧)하여 거창 현감(居昌縣監)을 지낸 후에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안 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재임시 정기룡(鄭起龍) 장군을 도와 의령(宜寧)을 거쳐 함안(咸安)으로 나아가 왜군의 적진을 급습(急襲)케 하여 전과(戰果)를 올렸다 . 전후(戰後)에 현재 우곡면 예곡리 산 12번지 낙동강변에 어목정(漁牧亭)을 짓 어 당대(當代)의 명사(名士)들과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여생(餘生)을 즐겼다 . 선조 38년(1605년) 임진왜란 때 전공(戰功)으로 선무원종이등공신(宣武原從二 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광해군 5년(1613년) 10월 27일 향년 71세로 졸 (卒)하여 합천군 초계(草溪) 견두리(犬豆里)에 수장(修葬)하였다 가 우곡면 도진 리 뒷산 자좌(子坐)로 이장(移葬)하였다. 사후(死後)에 광해군 9년(1617년) 가 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추증(追 贈)받았으며 문연서원(文淵書院)과 임난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배향(配享)되었다. 이밖에 고령박씨(高靈朴) 소윤공파(小尹公派) 후손 중 임진 왜란 때 도원(桃源) 박원갑(朴元甲)은 당숙(堂叔) 박정완(朴廷琬), 박정번(朴廷 璠)을 도와 창의(倡義)하였으며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무계전투(茂 溪戰鬪)에 참전(參戰)하였고 소고(笑皐) 박광선(朴光先)은 망우당(忘憂堂) 곽재 우(郭再祐) 진영의 모곡관(耗穀官)으로 종행(從行)하였으며 매헌(梅軒) 박효선 (朴孝先)은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입성하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郭再祐)의 장무관(掌務官)으로 활약을 하였다. 참고문헌 : 도원록(桃園錄), 난중잡록(亂中雜錄), 영남의병(嶺南義兵) 순영록 (巡營錄), 송암선생임난창의록(松菴先生壬亂倡義錄) ●배립(裵岦)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여경(汝卿)이다. 진사(進士) 진경(振經)과 참봉(參 奉)을 지낸 당(塘)의 딸인 의인(宜人) 포산곽씨(苞山郭氏) 사이에서 인종 원년 (1545년) 가정(嘉靖) 을미년(乙未年)에 둘째 아들로 고령군 쌍림면 학동(鶴洞 ) 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천성(天性)이 온순하였으며 효제(孝悌)와 문학(文學)으 로써 세상 사람들의 추중(推重)을 받았고 훈도(訓導)를 지냈다. 용사지난(龍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