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page

- 177 - 참고문헌 : 영조실록,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9권 ●박정완(朴廷琬)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양죽당(養竹堂)이다. 아버지 낙랑당(樂樂堂) 박택(朴澤)과 도사(都事) 최필손(崔弼孫)의 딸인 어머니 양천최 씨(陽川崔氏)사이에서 중종 38년(1543년) 장남으로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서 태어났으며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門人)이다. 그는 일찍부터 번거 롭고 속된 세상을 피하고 자연을 즐기고 덕성(德性)을 기르면서 효제(孝悌)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동생인 학암(鶴巖 ) 박정번(朴廷璠)과 함께 70여 명의 가동(家僮)을 이끌고 송암(松庵) 김면(金沔 ) 진영으로 달려가 공은 돌격장(突擊將)을,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은 참모장 서기(參謀掌書記)를 맡아 의병활동(義兵活動)을 활발하게 벌였다. 김면(金沔)이 1592년 6월 9일 묘시(卯時 : 오전 5시에서 오전 7시 사이)에 적이 현풍의 쌍 산강(雙山江 : 현풍 앞의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자 군관(軍官) 만호(萬 戶) 황응남(黃應男)이 정병(精兵) 30여 명을 데리고 요로(要路)에 매복(埋伏)해 있다가 왜선(倭船) 1척을 급습하여 적병 80여명을 사살하였고 6월 10일 또 왜 적과 접전하여 3급(級)을 베고 적선(賊船) 1척을 포획하고 궁중(宮中) 보화(寶 貨)를 노획하는 ‘개산포(開山浦) 대승첩(大勝捷)’을 거두었는데 개산포(開山浦 ) 지리(地理)에 밝은 박정완(朴廷琬) • 박정번(朴廷璠) 형제가 물속 깊이 수많은 말뚝을 치는 등 치밀하게 작전을 수입하여 기여한 전공(戰功)이 컸다. 동생인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은 형인 양죽당(養竹堂) 박정완(朴廷琬)에게 모든 공 을 돌려 주의 사람들로부터 칭송(稱頌)을 받았다. 또한 1592년 김면(金沔)이 6 월 18일경 무계진(茂溪津)에서 낙동강을 내려오는 적선 2척을 포획(捕獲)하여 노획((虜獲)하고 금안(金鞍), 적석(赤舃) 등 내탕(內帑)의 물건이 많았다. 박정완 (朴廷琬)이 장사(壯士) 4백여 명을 모집하여 김면(金沔)을 따라갔는데, 재산을 털어서 군량(軍糧)을 공급하였고 활과 화살도 직접 마련하여 무계전투(茂溪戰 鬪)에서 상당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개산포전투(開山浦戰鬪), 무계전투(茂溪 戰鬪)에서 승전(勝戰)한 것은 박정완(朴廷琬)의 힘이 컸는데도 공(功)에는 참여 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이러한 사실은 난중잡록(亂中雜 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 故事本末), 영남 의병(嶺南義兵) (순영록(巡營錄)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내암(來庵) 정인홍 (鄭仁弘)과 협력하여 성주(星州)의 안언(安彦) 전투에 참전(參戰)하였으며 송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