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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 - 참고문헌 : 순천박씨 판윤공 파보(갑술보),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선무원종공 신녹권, ●박이현(朴而絢)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여수(汝粹)이고 호는 창애(蒼涯)이다. 경릉참봉(敬 陵參奉)을 지낸 대영(大榮)과 공인(恭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장남으 로 중종 39년(1544년)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덕계(德溪) 오건(吳 健) 등 두 분의 선생의 문하에서 경의(敬義)의 가르침을 듣고서 암실(暗室)에서 밤낮으로 힘쓰고 두려워하며 방자하지 않았다. 검령(劍嶺) 아래에 정사(精舍 ) 몇 칸을 짓고 경전(經典)을 연구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 우옹(金宇顒)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서로 학문을 강론하면서 유풍(儒 風)을 강구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포의(布衣)로서 족제(族弟) 용담(龍潭) 이 장(而章)과 함께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송암(松菴) 김면(金沔) 진중(陣中)으로 달려가 찬획((贊劃)과 방수지책(防守之策)을 마련하였으며 성주(星州)의 가천(伽 川)에 보루(堡壘)를 마련하고 적을 섬멸(殲滅)하였다. 그해 7월 구성(龜城)의 패전(敗戰) 소식을 듣고 적을 쫓아 무주(茂朱)까지 간 후 금산(錦山)에 유진(留 陣)하고 있었던 재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각지세(犄角之勢)를 이루 어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해 10월에 대교평(大橋坪)에 이르 렀을 때에 날씨가 매우 차가와 눈이 날리고 있었으므로 군졸들이 매우 추워하 고 시장끼를 느끼고 있자 기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앞장서 돌진하며 독전(督 戰)을 하다가 말이 진흙 속으로 빠져들어 적에게 사로잡혀 창칼에도 굴복하지 않고 10월 25일 순사(殉死)하였다. 그러자 도신(道臣) 이 이 사실을 치계(馳啓 ) 하여 선조가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추증(追贈) 하였으며 인조 2년(162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었다. 영조 18년(174 2 년) 의민(毅愍)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사림들이 덕봉서원(德峯書院)에 입 향(入享)되었다. 묘는 고령군 운수면 봉평리 토곡 등대암(登坮岩) 임좌(壬坐)에 있다. 순충록(殉忠錄) 1권이 간행되었으며 유허비(遺墟碑)와 숭모비(崇慕碑)가 있다. 배위는 우후(虞侯) 흠조(欽祖)의 딸인 증정부인(贈貞夫人) 팔거도씨(八莒 都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