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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 - 공인(恭人) 화순최씨(和順崔氏)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명종 13년(1558년 ) 고령군(高靈郡) 덕곡면(德谷面) 인곡리(仁谷里) 옛집에서 태어났다. 신라 시조 왕(始祖王)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묘예(苗裔)로서 중시조(中始祖)는 판도판서 (版圖判書) 익대공신(翊戴功臣)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에 봉(封)하여 졌고 시 호(諡號)가 문헌(文憲)인 영균(永均)에 이어 조선조에 이르러 충청도(忠淸道) 도 순찰사(都巡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충간(忠簡)의 시호를 받은 문경 (文卿) 등 잠신(簪紳)이 빈출(彬出)된 명문가(名門家)의 후예(後裔)였다. 태어나 면서부터 재기(才器)가 비범(非凡)하였고 기개(氣槪)가 당당(堂堂)하였다. 너그 럽고 어질었으며 따사로운 은혜(恩惠)를 베풀었으며 숭조존현(崇祖尊賢)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등 효성을 지극히 하였고 더욱이 흉사(凶事)를 만날 때는 곳간(庫間)을 열어 자주 백성을 구제함으로써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성훈 (聖訓)을 몸소 행하였다. 특히 마을에다 인효충의정(仁孝忠義亭)을 지어 위기지 학(爲己之學)과 인의대도(仁義大道)를 후생(後生)들에게 순순(諄諄)히 훈도(薰 陶)하였으므로 세인(世人)이 인곡방(仁谷坊)이라 부르고 주부(主簿)로 문무겸전 (文武兼全)하였으므로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 때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창의(倡義)하여 합천(陜川), 고령(高靈)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낙동강변 무계산성(茂溪山城) 무계진(茂溪津 ) 에 이렀는데 이 진(津)이 바로 왜갈항(倭竭項) 속칭 왜갈목(倭竭목) 또는 왜갈 못(倭竭못)이었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보채(壘砦 : 보루)를 쌓고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보낸 전첨사(前僉使) 손인갑(孫仁甲) 군사와 무계성새(茂溪城塞)에 포진(布陣)중 군량(軍糧)이 떨어져 군병(軍兵)의 사기(士 氣)가 땅에 떨어져 있었으므로 공은 기아(飢餓)에 시달린 의병(義兵)에게 군량 미(軍糧米) 이천 석을 내어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신 의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각오로 독전(督戰)하니 전군(全軍)이 사기충천(士氣衝 天)하여 커다란 함성(喊聲)과 함께 일제히 기습공격(奇襲攻擊)을 개시(開始)하 여 왜군을 크게 쳐부수는 승첩(勝捷)을 거두었다. 적(敵)의 시체(屍體)에 막혀 강물이 흐르지 못했으므로 후인(後人)들은 이곳을 왜갈항대첩지(倭竭項大捷地 ) 로 불렀다. 공은 애석하게도 이 전투에서 1592년 6월 10일 진중순사(陣中殉 死)하고 말았으니 향년(享年) 37세였다. 후세사가(後世史家)들은 이 전투를 제 1 차 무계전투(第一次 茂溪戰鬪)라 기술(記述)하였다. 문경(聞慶)의 마포진(馬浦 津)에서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공의 빛나는 전공(戰功)을 감탄하면서 진중순절(陣中殉節)을 한없이 슬퍼하였 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말하기를 무계대첩(茂溪大捷)은 실로 운암(雲 庵) 박대복(朴大福)의 공효(功效)요 당당충의(堂堂忠義)의 고결함은 해나 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