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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 - 군과 홍한(弘漢)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龍驤衛) 부장(部將)을 지낸 두 문(斗文)의 손자로 종형제간(從兄弟間)이다. 송암(松菴) 김면(金沔) 의병도대장 (義兵都大將)을 비롯하여 팔인(八人)의 친족의사(親族義士)들이 임진왜란 때 바 친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과 호국충절(護國忠節)은 길이 청사(靑史)에 찬연 (燦然)히 기록될 것이다. 후손들은 김해(金海)와 거창(居昌) 등지에 세거(世居 ) 하고 있으며 2016년 11월 5일 거창군 웅양면 우두령(牛頭嶺 : 牛脊峴)에 세워 진 임진왜란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전적비(戰蹟碑) 제막 1주년 행사를 주관하기 도 하기도 하였다. (회장 김기현, 고문 김말암) 참고문헌 : 임진란위훈록(壬辰亂偉勳錄)Ⅱ, 임진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임진창의동고록(壬辰倡義同苦錄) ●김홍한(金弘漢)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여남(汝南)이고 호는 의재(義齋)이다. 충순위(忠順 衛)를 지낸 아버지 김옥(金沃)과 배대련(裵大練)의 딸인 의인(宜人) 성주배씨(星 州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선조 2년(1568년) 현재 고령군 쌍림면 반룡리에서 태어났으며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재종질(再從姪)이 다. 그 상조(上祖)는 고려 공민왕 때 광정대부(匡靖大夫)의 품계를 받고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와 서해도관찰사(西海道觀察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 城府事)에 올라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封)해진 김남득(金南得)이며 증조 김구(金鉤)는 중종 5년(1510년) 무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창성도호부사 (昌成都護府使)와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조부 김두문(金 斗文)은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부장(部將)을 지냈다. 공은 어릴 때부터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알아서 한결같이 부모 뜻을 받들어 따랐으며 또한 장재 (將材)의 기품(氣稟)이 있어 독서하는 여가에 무예(武藝)를 닦았다. 15세에 선 고(先考)를 여의고 고령군(高靈郡) 쌍림면(雙林面) 반룡리(盤龍里)를 떠나 현재 청도군(淸道郡) 이서면(伊西面) 수야리(水也里)로 이거(移居)하여 고령김씨(高靈 金氏) 청도파(淸道派)의 원조(元祖)가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4월 14일 부산포(釜山浦)가 함락(陷落) 당하고 동래산성(東萊山城)이 위급하다는 상황 정보를 입수하고 4월 15일 청도 일대에서는 아무도 왜구변란 (倭寇變亂)의 정세(情勢)를 알 수 없는 시점에서 전국(全國) 최초(最初)로 청도 (淸道)에서 의병(義兵)을 소모(召募)하여 고령 양전동(良田洞) 송암정사(松菴精 舍)의 유일헌(幽一軒)으로 달려가 왜구의 잦은 출몰(出沒)로 노심초사(勞心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