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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 - 이다.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수열(壽悅)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 府事) 열(栵)의 딸인 청도김씨(淸道金氏) 사이에서 명종 21년(1566년) 병인년 에 고령현에서 태어 났다. 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공은 서흥김씨(瑞興金氏) 영 남파(嶺南派)중 장파(狀罷)에 속하며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수현(首賢)인 한훤 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현손(玄孫)이다. 선고 수열(壽悅) 때부터 선향지 (先鄕地) 현풍(玄風) 지동(池洞)에서 고령(高靈)으로 이거하여 세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난(壬辰亂)이 일어나자 정이례(鄭以禮)와 함께 고령 지역의 의병(義兵)을 모으는 초모유사(招募有司)가 되어 같은 해 5 월 10일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합천군(陜川郡) 가야면(伽倻面) 숭산동 (崇山洞)에서 항일거병(抗日擧兵)에 대한 회의를 열고 격문(檄文)을 띄우고 동 참(同參)을 호소하자 고령지역에서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천의 정인홍 (鄭仁弘) 진영(陣營)에 참여하였던 사실이 난중잡록(亂中雜錄) 제일(第一) 임진 상(壬辰上)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암집(來庵集) 권이(卷二)에서 정인 홍이 선조 27년(1594년) 갑오(甲午) 2월 초9일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사직하면 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를 포상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던 소(疏)의 내용을 다음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킨 사람으로는 의령 의 곽재우(郭再祐), 거창의 김면(金沔),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 (李大期)ㆍ전우(全雨), 성주(星州)ㆍ고령(高靈)의 문려(文勵)ㆍ이홍우(李弘宇)ㆍ 이부춘(李富春)ㆍ김응성(金應聖)ㆍ박정완(朴廷琬) 등으로, 양식을 싸서 지고 재 물을 나누어 주며 사졸(士卒)보다 앞장서 강을 따라 적을 막고 힘을 합쳐 공격 해 싸웠습니다. 이 몇 사람은 반드시 강우(江右) 여러 고을의 방패막이가 아님 이 없었고, 또한 반드시 호남 한 도의 방패막이가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 공은 비록 크고 작음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나, 각자 그 지방을 지키며 목숨을 걸고 왜적을 토벌하였으니, 대개 이들은 동공일체(同功一體)의 사람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김면ㆍ곽재우와 보잘것없는 저에게 은명(恩命)을 내린 것이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 나머지 몇 사람은 공로에 보답한 은전이 있었 다고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습니다. 공로가 있어도 상을 주지 않고 상을 주어도 공로에 걸맞지 않는다면, 왜적을 토벌하는 대의를 장려할 수 없으니 어찌 앞뒤 의 방백(方伯)된 자가 전하께 보고하는 데 미진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신은 삼가 생각건대, 김면과 신은 일찍이 나라의 은전을 받아 부지런히 왜적을 토벌하였으니, 이는 본래의 직분으로 상전(賞典)을 다시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 그러나 저 몇 사람은 애초 일명(一命)도 없었던 사람인데 평민으로 궁벽한 시 골에서 하루아침에 의기를 떨쳐 강한 왜적에 대항하였으니, 조정의 상명(賞命 ) 을 반드시 이 몇 사람에게 먼저 넉넉하게 해야 한 도의 인심을 만족시킬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