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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 - 딸인 숙부인(淑夫人) 현풍곽씨(玄風郭氏)로 난중(亂中)에 친정(親庭)에서 졸(卒 ) 하였다. 참고문헌 : 임진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임진동고록(壬辰同苦錄) 고령김씨족보(갑술보) ●김연(金演)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형원(泂源)이고 호는 송호(松湖)이다. 용양위(龍驤 衛) 부장(部將)을 지낸 두문(斗文)과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낸 우(雨)의 딸 남 원김씨(南原金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명종 2년(1547년) 고령군 개진면 양전 리(量田里)에서 태어났다. 재종형(再從兄) 송암(松菴) 면(沔)과 백형(伯兄) 송계 (松溪) 길(洁)과 더불어 학문을 닦고 행의(行誼)와 문학(文學)이 세상에 드러나 니 사람들이 김씨삼군자(金氏三君子)라 칭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면(沔) 의병장(義兵將) 휘하에서 모계(茅溪) 문위(文 褘), 존재(存齋) 곽준(郭䞭), 영호(瀯湖) 윤경남(尹景男), 어적산인(漁適散人) 류 중룡(柳仲龍) 등 참모(參謀)와 함께 전쟁의 계획(計劃)과 전략(戰略)을 도왔다. 정암진(鼎岩津), 무계(茂溪), 거창 우척현(牛脊峴) 전투 둥에서 많은 전공(戰功) 을 세워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除授)되었다. 임진왜란 이 끝난 후에 증(贈) 참의(參議) 행(行) 만호(萬戶)를 지낸 장인 박원우(朴元 祐)의 고향인 울산부(蔚山府) 청량청간(靑良靑艮) 석남촌(昔南村)으로 이거(移 居)하여 고령김씨(高靈金氏) 울산(蔚山)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에는 울산의 도산성(島山城) 전투(戰鬪)에도 군공(軍功)을 세웠다. 선조 32년 (1599년) 10월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울산(蔚山) 서생성(西生城)에 주둔(駐屯)하면서 창표당(蒼表堂)을 짓고 전공(戰功)이 많은 의사(義士)들의 공 훈(功勳)을 현창(顯彰)하기 위하여 신위(神位)를 열향(列享)할 때 감동부장(監董 部將)으로 만도(晩到) 15원(員) 가운데 일인(一人)으로 모셔졌다. 인조 18년 (1640년) 11월 5일 향년 94세로 돌아가셨다. 묘는 울주군 청량면 진곡동(眞谷 洞) 해좌(亥坐)에 있고 행장(行狀)은 도사(都事) 김도화(金道和)가 묘지명(墓誌 銘)은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묘갈명(墓碣銘)은 승지(承旨) 향산(響山) 이만 도(李晩燾)가 각각 지었다. 배위는 증참의행만호(贈參議行萬戶) 원우(元祐)의 딸인 흥려박씨(興驪朴氏)로 합폄(合窆)이다. 울산시 중구 반구동 충의사에 위패 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