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page

- 164 - 급습하여 적병 80여명을 사살하였고 6월 10일에는 또 왜적과 접전하여 3급 (級)을 베고 적선 1척을 포획(捕獲)하였는데 노획(鹵獲)한 보화(寶貨)를 초유사 (招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어 행재소(行在所)에 전하도록 하 였다. 제2차 무계전투(茂溪戰鬪)에서 김면이 6월 18일경 무계진(茂溪津)에서 낙동강을 내려오는 적선 2척을 포획(捕獲)하여 노획했는데 내탕(內帑)의 물건 이 많았다. 공은 제2차 무계전투(茂溪戰鬪)의 전공(戰功)으로 인하여 동년 6월 29일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제수되었다. 7월10일 거창(居昌)과 개령(開寧) 사이 의 험준한 고개인 우척현(牛脊峴)에 2000여명의 의병과 산척(山尺)으로 부르는 약초꾼들과 포수들을 대거 참전시켜 기습전(奇襲戰)을 벌여 적들이 북으로 달 아나는 대승(大勝)을 거두 왜군들의 전라도 진출이 좌절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으며 임진왜란 때 산악전투(山岳戰鬪)의 대표적 사례이었다. 7월 29일에 서 8월 1일 지례전투(知禮戰鬪)에서 화공(火攻)으로 지례관사에 모인 1500여명 의 왜군을 전멸(全滅)시켰다. 8월 3일 거창의 사랑암(沙郞巖) 전투에서 왜적 4000여명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8월 19일에서 20일에는 제 1차 성주성전 투(星州城戰鬪)를 벌였는데 적세(賊勢)가 강성(强盛)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 다. 조정에서는 9월 9일 공을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하였다. 9월10일부터 9월 11일까지 벌어진 제2차 성주성전투(第二次 星州城戰鬪)에서는 공격시기가 적절치 않았고 합천군수 배설(裵楔)이 공의 명(命)을 따르지 않았으며 불의(不 意)의 급습(急襲)을 받아 부득이 후퇴하였다. 10월과 11월에는 공의 의병활동 에 특별함이 없었다. 11월에 경상도의병도대장(慶尙道義兵都大將)에 특명(特 命)되었다. 12월 7일에서 14일까지 벌어진 제3차 성주성전투(第三次 星州城戰 鬪)에서는 경상도, 충청도, 호남의병진의 대규모 연합작전으로 의병(義兵) 대군 (大軍)이 협공(挾攻)하자 왜군이 익년 1월 15일 성주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으므 로 성주성(星州城) 탈환(奪還)에 성공하였다. 선조 26년(1593년) 정월 4일에 경상도 의병도대장(慶尙道 義兵都大將)의 특명(特命)을 받아 한 도(道)의 군 (軍)을 통솔(統率)하게 되었다. 1593년 1월 5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가 되어 같은 해 3월 개령(開寧)에 진을 치고 선산(善山)의 적을 격멸하려던 중 우연히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산진중(金山陳中 : 지금 김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운명 직전 “只知有國不知有身(단지 나라 있는 줄은 알았으나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칠동산(七洞山) 유좌(酉坐)에 초취 및 재취 전주이씨(全州李氏 ) 와 함께 삼위합분(三位合墳)이며 윤선거(尹宣擧)가 행장(行狀)을 짓고 신도비 (神道碑) 비문(碑文)은 체재공(蔡濟恭)이 근찬(謹撰)하였다. 선조 40년(1607년 ) 에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정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正憲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