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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 - 산(金山) 진중(陣中)에서 순직(殉職)하자 신창(新倉)에서 고령 칠등(七嶝)으로 호상(護喪)하였다. 선조 32년(1599년) 7월 9일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 면 고곡리 칠동(七洞) 해좌(亥坐)에 있고 배위는 참봉(參奉) 성경(成慶)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진주최씨(晋州崔氏)로 합폄(合窆)이다. 참고문헌 : 임진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고령김씨족보(갑술보) ●김면(金沔)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경원도호부 사(慶源都護府使)를 지낸 세문(世文)과 예빈시(禮賓寺) 판관(判官)을 지낸 김중 손(金仲孫)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 장남으로 중종 36년(1541년) 4 월 2일에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태어났다. 11살에 퇴계(退溪) 선생을 찾아 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배웠고 20세 전후로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 溪) 이황(李滉)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였다. 3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까지는 명륜지(明倫誌), 역리지(易理誌) 등을 저술(著述)하였으며 선조 22년(1589년) 5 월에는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모재(茅齋) 이홍 우(李弘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 량(李弘量) 등 낙강칠현(洛江七賢)과 함께 낙동강을 선유(船遊)하며 만경창파욕 모천(萬頃蒼波欲暮天 : 저녁 때의 저무는 하늘에 한없이 넓고 푸른 물결) 일곱 자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다. 51세가 되던 때에 은일(隱逸)로 공조좌랑(工 曹佐郞)에 제배(除拜)되자 부득이 사은(謝恩)만 하고 이내 낙향(落鄕)하였다 . 52세가 되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이 부산에 상륙한 지 28일 만에 가동(家僮 : 집의 종) 700여 명을 인솔하여 1592년 5월 11일 정식으로 기병(起兵)하였으나 고령에 적병이 이르니 고령이 잔소(殘少)하다고 하여 거창 으로 달려가 그곳의 선비와 백성이 약간의 군사를 모아 공에게 합류(合流)하였 다. 조종도(趙宗道)를 조군(調軍)ㆍ곽준(郭逡)ㆍ문위(文偉)ㆍ박정번(朴廷璠)ㆍ류 중룡(柳仲龍) 등으로 참모장서기(參謀掌書記)로 삼아 거창(居昌)ㆍ고령(高靈 )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糾合)하였고 박성(朴惺)은 전향(典餉)으로써 군량 (軍糧)을 조달하게 하였다. 4일∼5일 동안에 군사 2,000명을 모았으며 1593년 1월에는 5,000명으로 대군화(大軍化)하게 되었다. 창의(倡義)한 후 첫 전과(戰 果)는 개산포전투(開山浦戰鬪)이었다. 공은 6월 9일 적이 현풍 앞의 낙동강인 쌍산강(雙山江)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자 군관(軍官)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 ) 이 정병(精兵) 30여 명을 데리고 요로(要路)에 매복(埋伏)해 있다가 왜선 1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