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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 -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사납(士納)이다. 사섬시(司贍寺) 참봉(參奉)을 지 낸 윤복(潤福)의 아들로 명종 11년(1556년)에 태어났다. 선조 15년(1582년) 식 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며 묘 (墓)와 배위(配位) 성씨(姓氏) 실전(失傳)이다. 참고문헌 : 만력10년임오2월28일사마방목(萬曆十年壬午二月二十八日司馬榜目 ) 동래정씨 정절공 파보(계축보) ●정홍석(鄭弘錫)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계응(季膺)이고 호는 운계(雲溪)이다. 장사랑(將仕 郞)을 지낸 지(墀)와 도사(都事) 수(受)의 딸인 진양하씨(晋陽河氏) 사이에서 선 조 40년(1607년)에 태어났다. 치재(癡齋) 허명신(許命申)에게 수업(受業)하였다 . 인조 20년(1642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학과 행의(行誼)로 영남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년)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倡義)하였으며 운계정(雲溪亭)을 구축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저서로 시문집 『운계선 생문집(雲溪先生文集)』과 존명양이(尊明攘夷)의 사적(事蹟)을 간추린 존주록(尊 周錄)이 있다. 현종 12년(1671년) 6월 9일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에 있다. 숙종 30년(1704년) 문하생들이 모여 영상(影像)을 덕곡면 반성 1동 만하동(晩霞洞)에 모셔 형산사(刑山祠)라 한다. 정위가 행장기(行狀記)를 지었고 정종로(鄭宗魯)가 유허비명(遺墟碑銘)을 지었다. 후손들이 1820년(순조 20)에 정홍석유허비명(鄭弘錫遺墟碑銘)을 건립하였다. 초취(初娶)는 천봉(天封 ) 의 딸인 경산이씨(京山李氏)이며 재취(再娶)는 주부(主簿)를 지낸 신(信)의 딸인 언양김씨(彦陽金氏)이다. 註)존명양이尊明攘夷):조선 후기에는 보통 정통의 명(明) 나라를 존숭(尊崇)하 고 오랑캐인 청(淸) 나라를 배척한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참고문헌 : 경북을 빛낸 인물, 임오식년사마방목(壬午式年司馬榜目), 동래정씨 정절공 파보(계축보) ●정홍영(鄭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