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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 - 를 지낸 윤세정(尹世禎)과 집(楫)의 딸인 홍주홍씨(洪州洪氏) 사이에 둘째 아들 로 연산군 6년(1500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부모를 모실 때는 몸과 마음을 함께 봉양하였으며 형을 섬김에는 사랑함과 공경함을 함께 갖추었다. 뜻은 또 청렴하고 곧았으며 비록 끼니를 걸렀지만 의(義)가 아 니면 남에게서 받거나 주지를 않았다. 중종26년(1531년) 식년(式年) 진사시(進 士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대과(大科)는 일찍이 포기하였다.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였고 글짓기를 좋아하였는데 문장가(文章家)로 알려졌다. 남명(南冥) 조 식(曺植),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낙천(洛川) 배 신(裵紳), 등 제현(諸賢)과 도의(道義)로 사귀고 학문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 다. 퇴도학사록(退陶學士錄)에서 공의 행적(行蹟)을 높이 칭송하고 종유(從遊 ) 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공에게 시를 써서 주었다. 文老才名第一流(문로재명제일류) 문로(文老 : 윤규)의 재주와 명성 일류인데 從前卜築更深幽(종전복축경심유) 전날 터잡아 지은 집 깊고도 그윽하다 性耽泉石堪棲隱(성탐천석감서은) 천성이 자연을 즐겨 깃들어 숨을 만하고 身厭簪紳不宦遊(신염잠신불환유) 몸은 관복(官服)을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았네 魂夢欲尋迷半路(혼몽욕심미반로) 꿈속에서 찾아가고자 해도 중간 길 모르겠고 書筒難遞隔三秋(서통난체격삼추) 편지 전하기 어려워 삼년이나 소식 몰랐지 名場宿債今抛盡(명장숙채금포진) 명리(名利)의 마당에 묵은 빛 이제 모두 버렸지만 老境光陰亦不留(노경광음역불류) 노년의 세월은 또한 멈추어 주지를 않는구나 공은 명종 15년(1560년) 향년 61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우곡면 오리 산(梧里山) 43번지 건좌원(乾坐原)에 있다. 인조 14년(1636년) 지방유림의 공 의(公議)로 죽연(竹淵) 박윤(朴潤)· 낙낙당(樂樂堂) 박택(朴澤)·월오(月塢) 윤규 (尹奎)·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매헌(梅軒) 최여설(崔汝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문연서원(文淵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994년 4월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