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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 - 禮)대로 따랐고 여묘(廬墓)하여 3년을 마쳤다. 명종 16년(1561년) 식년(式年 )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명종 20년(1565년) 성균관(成均館) 유생(儒 生)에 대한 천거(薦擧)인 관천(館薦)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그 후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빙고별좌(氷庫別座)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4년(1571년) 조정에서 재능이 없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도태 (淘汰)하고 특별히 명유(名儒)를 가려 맡길 것을 명하였는데 이조(吏曹)와 예조 (禮曹)가 배신(裵紳)과 조목(趙穆)을 맨 먼저 천거하여 낙점(落點)되어 교관(敎 官)이 되었으며 그를 쫓아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강소(講所)에 다 수 용할 수가 없었으며 반드시 소학(小學)을 우선으로 하여 가르쳤다. 이듬해 고 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초당(草堂) 허엽(許曄 ) 등 제공(諸公)이 만류하였다.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였고 문장(文章)은 섬려 (贍麗)하면서도 법도(法度)가 있었다.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죽자 나 라에서 그의 행적(行蹟)을 알고자 하였으므로 많은 문도(門徒) 중에 공이 천거 되어 조명(朝命)으로 「남명선생행록(南冥先生行錄)」을 지어 올렸으며 남명(南 冥) 조식(曺植)과 함께 경상우도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인 송계 (松溪) 신계성(申季誠)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글인 행록(行錄)을 지었다. 공은 낙동강 위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일컫기를 ‘낙천 선생(洛川先生)’이라 하였으 며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과는 도의교분(道義交分)하였고 당대의 뛰어난 학 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덕계(德溪) 오건(吳健)와 친밀하게 지냈다. 임 진왜란(壬辰倭亂) 때 각종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 송암(松菴) 김면(金沔),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의 참모(參謀)로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던 대암(大庵) 박성(朴惺), 정유재란(丁酉 再亂)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부자(父子)가 함께 순절(殉節)한 존재(存齋 ) 곽준(郭䞭) 등 창의(倡義)에 동참하여 진충보국(盡忠報國)한 분들은 모두 공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선조 6년(1573년) 12월 17일 병으로 서울에서 향년 54세로 졸(卒)하였다. 선생이 몰(歿)하자 조정(朝廷)의 현사대부 (賢士大夫)로부터 벼슬을 못한 선비인 위포사(韋布士)에 이르기까지 선생을 알 고 있는 이는 눈물을 흘리고 조상(弔喪)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의복가지를 보 내서 수의(襚衣)로 쓰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아들 희(暿)가 반상(返喪)하여 다음달 27일에 고령군 개진면 봉동후(鳳洞後) 장등(長嶝) 건좌(乾坐)에 장사(葬 事)지냈다. 철종 13년(1862년)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응와(凝窩) 이원조 (李源祚)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던 시문집(詩文集) 2권 2책인 낙천문집(洛川 文集)이 전한다. 인조 11년(1633년) 10월 고령(高靈)에 사는 전 참봉 이현룡 (李見龍) 등이 상소(上疏)하여, 선사(先師) 신(臣) 배신(裵紳)을 포상(褒賞)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