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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 - 로 천거(薦擧)하므로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의 사 부(師傅)로 수년간 지냈는데 대군이 지극한 예우로 대하였고 인조(仁祖)께서도 가상(嘉尙)하게 여겼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인조 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낙동강가에 집 한 채를 지어 그 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생각하여 자호(自號)를 기옹(畸翁)이라 하고 은거하였다. 그것 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부터 고향에서 만 년(晩年)의 지기(知己)로 지내면서 교유하였던 분은 절행(節行)으로 명성을 떨 쳤던 천미거사(天微居士) 이필행(李必行)이었다. 병자호란의 굴욕에 비분강개 (悲憤慷慨)하여 다수의 충분시(忠憤詩)를 남기었으므로 공의 절의와 기개를 기 리어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호칭하며 존경하였다. 특히 한강(寒岡) 선생 문하의 제현(諸賢)중 동계(桐溪) 정온(鄭蘊)과는 의리가 깊고 혼인도 하여 교우관계가 가장 깊었다. 효종 9년(1658년) 3월 18일 유시(酉時)에 졸(卒)하니 향년 72세 이었다. 같는 해 5월 20일 신시(申時)에 성주 위곡(蝟谷 : 현재 운수면 유리 ) 자좌원(子坐原)에 장례를 치루었다. 그 부음(訃音)이 조정에 알려지자 효종은 옛날 정의(情誼)를 생각하여 관원(官員)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친히 5척(五尺 ) 의 비석(碑石)에 ‘조산대부(朝散大夫) 대군사부(大君師傅) 박공지묘비명(朴公之 墓碑銘)’ 이라는 비석문을 써서 주었으니 이것이 고령지역의 최초 어필(御筆 ) 비문(碑文)이었다. 또 묘소 주위에 있는 산과 토지를 하사받았다. 이것은 특별 한 예우(禮遇)이였다. 어필비각(御筆碑閣)를 세우기 위하여 대지를 조성할 때 임금이 공신에게 주었던 땅 즉 사패지지(賜牌之地)를 뜻하는 성사동(聖賜洞)이 라는 바위가 발견되었다.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공의 외손 참봉(參 奉) 남양(南陽) 홍서주(洪敍疇)가 지은 행장(行狀)을 근거로 대광보국(大匡輔國 ) 숭록대부원임(崇祿大夫原任)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겸(兼) 영경연사(領 經筵事) 서하(西河) 임백경(林百經)이 어필비문(御筆碑文) 조산대부(朝散大夫 ) 대군사부(大君師傅) 박공지묘비명(朴公之墓碑銘)을 찬(撰)하여 후손들이 비를 세웠다. 문집에는 기옹집(畸翁集)이 있으며 저서로는 명의록(明義錄), 성사록 (誠思錄), 독서요어(讀書要語) 등이 있다. 초취(初娶)는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세철(世哲)의 딸인 옥산장씨(玉山張氏)이며 재취(再娶)는 형조참판(刑曹參 判)을 지낸 민환(民寏)의 딸인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 참고문헌 : 만력40년임자3월13일사마방목(萬曆四十年壬子三月十三日司馬榜目 ) 순천박씨 판윤공 파보(갑술보), 대군사부(大君師傅) 기옹선생(畸翁先 生) 박공(朴公) 행장(行狀), 최고•최초를 찾아라 고령기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