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page

- 137 - 손과 문인들이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학음서당(鶴陰書堂)을 열었으며 서당 경내에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으며 비석에는 ‘학양박선생강도지소(鶴陽朴先生講道之所)’라 큰 글씨로 적어 놓고 그 아래 학 음서당(鶴陰書堂) 비명을 적고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을 학양 박경가 강도비(鶴 陽朴慶家講道碑)라 하기도 한다. 이 비문은 하산(夏山) 조긍섭(曺兢燮)이 짓고 , 치성(治城) 송홍래(宋鴻来)가 새기고, 현손(玄孫) 박재룡(朴在竜)이 썼다. 시문 집인 학양집(鶴陽集) 2권 1책이 전한다. 초취(初娶)는 계진(啓晋)의 딸인 벽진 이씨(碧珍李氏)이고 재취(再娶)는 녹화(祿和)의 딸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이며 삼취(三娶)는 최강(最剛)의 딸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참고문헌 : 숭정3[4]경오식사마방목(崇禎三[四]庚午式司馬榜目), 도원록(桃園 錄), 고령박씨 소윤공파 파보(갑오보), 학양집 ●박공구(朴羾衢)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자룡(子龍)이고 호는 기옹(畸翁)이다. 선조 20년 (1587년) 12월 4일 정해(丁亥) 부제학(副提學)·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吏曹參 判)·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과 참판(參判) 박응복(朴 應福)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충주박씨(忠州朴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고령 군 쌍림면 용담리(龍潭里)의 본제(本第 : 고향에 있는 본집)에서 태어나 서울에 서 성장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거동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고 여러 아이들과 놀 때도 그 중에서 어른 노릇을 하였다. 7세에 공부를 시작하여 재주가 탁월하였 으므로 경전을 한번 보면 기억하였고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하였다. 하루 는 선생의 재주를 시험하기 위하여 송죽(松竹)에 대한 시를 지으라 하자 선생 은 즉시 칠언 일구를 지어 “雪打孤松(설타고송) 松不屈(송불굴) 風驅疎竹(풍구소죽) 竹無牽(죽무견) 외로운 소나무에 눈보라가 몰아치나 소나무는 온갖 어려움에도 굽히지 아니하 고 몰아치는 바람에 대나무는 성기나 얽매임이 없네”라고 하므로 그 늠름한 지조(志操)를 칭찬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26세 가 되던 해인 광해군(光海君) 4년(1612년) 식년(式年)에서 진사시(進士試)에 입 격(入格)되었으나 성리학(性理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인조 원년(1623년) 세 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로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상(居喪) 중에 있 었으므로 나가지 않았고 그 후 학행(學行)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받은 후 관찰사(觀察使)가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를 따라 공을 대군(大君)의 스승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