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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다.”라고 하여 교육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부모의 특별한 관심 속 강수는 공 부에 열중하여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강수는 당시 불교가 성행하였는데 “불가 의 설은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내세만을 중히 여기니 나는 현세를 중 히 여겨 여기에 대한 진리를 연구하겠다.” 하여 당나라에서 들어온 효경(孝經) , 예기(禮記), 이아(爾雅), 문선(文選) 등을 통달하여 그의 명성이 신라에 알려지 게 되었다. 강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화(冶花)라는 대장장이 천민 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당시 신라는 태종무열왕이 즉위하면서 당나라와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나당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통일 을 원하는 외교전에 문장력이 크게 필요할 때 강수가 발탁되어 당에서 오는 외교문서를 일일이 왕께 고하였다. 그 모든 것들이 무열왕을 감탄케하여 강수 를 불러 “그대의 해석이 적절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자 강수는 “신은 본래 임나가랑인이요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 라 하였다. 왕은 “경의 뒤통수 를 보니 뿔이 났구나 머리에 뿔이 났으니 머리가 강하겠다 그래서 강수라 하 라.” 하였다. 무열왕 때부터 문무왕 때까지 당과의 문서 왕복은 각자 자기나라 의 국익을 위한 복잡한 외교로 작은 나라 신라로서는 매우 어려운 형편인데 이일을 모두 강수가 맡아 해결하였다. 문무왕은 강수에게 “백제와 고구려를 멸 하고 당나라 군사까지 몰아낸 것은 군인들의 용감한 전투도 있지만 거의 반은 강수 문장의 힘이다.” 하고 사찬(沙湌 : 신라17관등의 8째 등급의 벼슬을 주고 벼 200석을 주었다. 강수는 대문장가로 삼국통일의 주역이며 양가의 규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천민의 딸과 결혼, 당시의 철저한 신분제사회였지만 출세보다 유교적 윤리의식의 도덕적 실천가이기도 하였다. 신문왕 대에 강수가 죽자 그 의 처 야화는 남편의 고향으로 귀장할 때 나라에서 많은 물품을 내렸는데 그 물품 모두 절에다 바치고 막상 남편을 귀장할 때 형편이 너무 어려워 친정에 서 약간의 전곡을 마련하여 사용하였다. 나라에서 이러한 어려운 사정을 알고 벼 100석을 하사하니 “첩은 본래 천인으로서 남편의 덕으로 잘살았습니다. 이 것은 모두 나라의 은혜이오니 신자의 도리로써 받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모두 돌려보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강수는 자기 자신만 청렴한 것 이 아니라 그의 처까지도 청렴하구나.” 하고 극찬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권제46 열전 제6, 문경현교수 가야사의 신고찰 12P, 이상옥교수 한국의 역사 367~373P, 경주시지(1971년 발행 ) 931~932P, 주보돈교수 가야인 신라에서 빛나다. 1974.11.23.서 울신문 “고대문화의 재음미”, 좌담기사 김원용, 이기백교수 대 담, 조선명인전(문호사간 15P), 대가야의 얼 1982년 고령군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