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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 학문이 깊은데다 문장까지 뛰어났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보통사람 들이 범접(犯接)하지 못할 학문과 문장을 갖추었고 지조와 절개 또한 빼어나서 한 나라의 승상(丞相)이 될 만한 재목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초은(樵隱) 이인복 (李仁復)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양광도 안렴 장령 한철충(韓哲冲)을 전송하며 [送楊廣按廉韓掌令哲冲(송양광안렴한장령철충)]” 라는 시를 주어 이르기를 經術儒爲貴(경술유위귀) / 경술하는 선비는 귀중한 것 廉能世所賢(염능세소현) / 청렴과 재능은 세상에서 어질게 여기네 判花參國論(판화참국론) / 화판 찍어 국론에 참예를 하고 捧簡肅朝聯(봉간숙조련) / 백간 받들어 조정을 숙청하였네 掦歷名尤著(척력명우저) / 좋은 벼슬 지내어 이름 더욱 나타났고 澄淸志益堅(징청지익견) / 천하를 맑게 할 뜻이 더 굳어졌네, (이하 중략) 벽송정(碧松亭) 아래에 유생(儒生)들이 기숙(寄宿)하면서 공부(工夫)하던 방(房 ) 인 공의 재사(齋舍)가 있었다고 청주한씨 몽계공 파보(정사보)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은거(隱居)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본다. 묘소는 합천군 용주면 용 지리 분토동(粉土洞) 자좌(子坐)에 있다. 1910년 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한 은진(恩津) 송병순(宋秉珣) 찬(撰)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묘 아 래에 4칸의 재실 망송재(望松齋)와 부속 건물을 지었는데, 재호(齋號) 망송재 (望松齋)는 송도(松都)와 선산(先山)을 바라보면서 충효(忠孝)를 다한다는 의미 이다. 야성(冶城) 송준필(宋浚弼)의 망송재(望松齋) 중건기(重建記)가 있다. 고 려 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기려 조선시대에 들어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 二賢)’으로 추모되었다. 합천군 가야면 사동(蓑洞 : 현재 사촌리 속칭 뉘기)에 면암서원(冕巖書院)을 짓고 공과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후계(后溪) 김준 (金俊)의 삼현(三賢)을 향사(享祀)하였으며, 경현사(景賢祠)에도 배향(配享)되었 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린 뒤, 서원의 빈터 앞에 몽계 공원기신도비(夢溪公院基神道碑)를 세웠다. 초취(初娶)는 정경부인(貞敬夫人 ) 이씨(李氏), 재취(再娶)는 대언(代言) 확(確)의 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권 씨(安東權氏), 삼취(三聚)는 위위(衛尉) 지순(之順)의 딸인 영가장씨(永嘉張氏 ) 가 있었다. 유고(遺稿)로 『몽계선생유적(夢溪先生遺蹟)』이 있는데, 광무 8년 (1904년)에 후손 한정국(韓貞國)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註1) 화판(花判) :당 나라 때 중서사인(中書舍人)들의 오화판사(五花判事)를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