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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의 사당 터에 해인사를 창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동문선(東文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고 령군 대가야박물관·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8, 『고령문화사대 계』1-역사편. ●이정(利貞) 이정은 순응과 비슷한 5두품에 준하는 신분의 지방 출신이었다. 멸망한 대가 야 왕족의 후예가 겪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출가하여 의상계 화엄종 승려가 되었다. 아마도 동일한 신분적 배경을 지닌 순응의 영향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66년경 순응과 함께 당에 가서 우두선(牛頭禪)을 익히 는 등 교선일치(敎禪一致) 사상의 경향을 지녔다. 802년 순응과 함께 해인사 창건을 주도하였으며, 순응이 선림원(禪林院)으로 떠나자 해인사 창건을 마무 리하였다. 이정과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여 그의 저술이나 작품, 묘소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900년경에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이정의 전기를 찬술하였 다. 참고문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태식 ,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고령군 대가야박 물관·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8, 『고령문화사대계』1-역사편. ●임강수(任强首) 강수는 신라 태종무열(太宗武烈)왕대에 대당외교문서(對唐外交文書)을 위시한 고문대책(高文大冊 : 문장이 빼어나고 내용이 웅대한 저작)을 도맡은 신라 통 일기에 대문호(大文豪)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의 주역중 무(武)는 금관가야(金官 加倻)의 김유신(金庾信)이라면 문(文)은 대가야(大加耶)의 강수로써 가야의 국 력은 여기서 나타난다. 강수의 아버지는 나마(신라17관등의 11째 등급)벼슬을 한 석체(昔諦)라는 사람이다. 강수의 어머니가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의 꿈을 꾸 고 임신하였는데 강수가 태어났을 때 강수의 뒷머리뼈가 높이 솟았다 한다. 아 버지 석체는 “우리집은 임나가랑국의 대신의 집이면 대대로 글을 좋아하는 집 안이다. 지금 나라는 망했지만, 장차 네가 우리 집안을 다시 빛을 내어야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