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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 -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묘부(畝夫)이고 호(號)는 오로재(吾老齋)이다. 내 섬시(內贍寺) 판관(判官)을 지낸 선경(善卿)과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 낸 유(洧)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태종 17년(1417년)에 태어났 다. 세종 24년(1442년) 친시(親試)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단종 1년(1453년 ) 종성절제사(鍾城節制使)로 재임 중에 함길도절제사(咸吉道節制使) 이징옥(李澄 玉)의 난(亂)을 당하여 이징옥(李澄玉)을 포살(捕殺)한 군공(軍功)으로 옷 1습 (襲)을 하사받았고 1등 공신에 책록(冊錄)되고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켰으 며 단종 2년(1454년) 행종성도호부사(行鍾城都護府使)에 제수(除授)하였다. 곧 첨지중추 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행상호군(行上護軍)이 되었으며, 이듬해 세조의 즉위를 도와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세조 3년(1457년 ) 3월 충청도절제사(忠淸道節制使)가 되고, 세조 7년(1461년) 10월에는 중추원부 사(中樞院副使)로서 홍익성(洪益成)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 다. 세조 9년(1463년) 경상좌도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使)를 지내고, 세조 1 3 년(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에는 이종(李徖) 휘하로 총통군(銃筒軍 ) 을 이끌고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평정에 군공(軍功)을 세워 적개공신3등(敵 愾功臣三等)에 책록되고 전토(田土)와 노비[臧獲]를 하사받았다. 행충무위상호 군 겸 오위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공신연(功臣宴)을 베풀면서 세조 가 정충 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 가정대부(嘉靖大夫) 행 충무위상호군(行忠武 衛上護軍) 겸 오위장(兼五衛將) 칠산군(漆山君) 정종(鄭種)에게 하교(下敎)하기 를, "왕은 이르노라. 충성(忠誠)을 다하여 난(難)을 이기고 이미 불세(不世)이 공훈(功勳)을 세웠으니, 덕(德)을 높이며 공(功)을 갚는데 어찌 비상(非常)한 은 전(恩典)을 거행하지 않겠는가? 만약 지나간 문첩(文牒)을 상고하더라도 스스 로 떳떳한 전장(典章)이 있었다. 지난번에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가 감히 흉악한 모계(謀計)를 부려서 장수와 수령을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켜 감히 항 거(抗拒)하여, 흉악한 기염(氣焰)이 더욱 성하였다. 내가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 하게 하였는데, 경이 능히 몸을 돌아보지 않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기계(奇 計)를 내어 제승(制勝)하니, 드디어 적도(賊徒)로 하여금 와해(瓦解)되게 하고 , 원흉(元兇)의 머리를 바쳤다. 공훈(功勳)이 이미 성하므로, 상을 어찌 늦추겠는 가?……아아! 이름이 죽백(竹帛)에 드리워 이미 크게 내려 주는 총애(寵愛)의 법(法)에 응(膺)하였으니, 산하(山河)를 가리켜 맹세하고, 영세(永世)토록 함께 아름다움을 누리기를 보전하도록 바란다."고 하였다. 곧이어 동평군(東平君)으 로 개봉(改封)되었다. 성종 2년(1471년) 9월 경주부윤(慶州府尹)되었으나 성종 3년(1472년) 한황(旱荒)이 계속되어 농작물에 대한 손실을 조사하였으나, 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