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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 - (寧 海府使)를 제수(除授)받았다. 성종 20년(1489년) 올적합(兀狄哈)의 침입을 방어하지 못하여 우후(虞候)에서 파직(罷職)되었으나 성종 22년(1491년) 절충 장군(折衝將軍) 경상좌도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연산군 3 년(1497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재임 중 괴선 한 척을 포획한 군공(軍功)으 로 봉천군(篷川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여러 차례 주(州)ㆍ군(郡)의 수령을 맡아 왔는데, 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중종 1년(1506년) 향년 72세로 졸 (卒)하였다. 반암서원(盤巖書院) 옆 숭덕재(崇德齋)가 공(公)을 봉향한 재실(齋 室)이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장방동 백호변(白虎邊) 자좌(子坐)이다 . 배위는 봉상윤(奉常尹) 계선(繼善)의 딸인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동래정씨 정절공 파보(계축보) ●정전(鄭荃)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자원(子遠)이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 曹判書)를 증직(贈職)받은 원운(元耘)과 계림(繼林)의 딸인 영천최씨(永川崔氏 ) 사이에서 성종 6년(1475년) 태어났다. 연산군 4년(1498년) 식년(式年) 진사시 (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중종 4년(1509년)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 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으며, 사관(史官)의 재 주가 있다고 하여 추천을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옮기었고 이어 대교 (待敎)로 승진하였다. 중종 6년(1511년)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여 거상(居喪) 을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치르다가 몹시 슬퍼한 나머지 병이 들었고, 그로 부터 2년이 지난 중종 8년(1513년) 2월 24일에 복상중(服喪中)에 졸(卒)하였으 니, 이때 나이가 겨우 39세였다. 광주(廣州) 옹정산(瓮亭山) 계좌 정향(癸坐丁 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참판(參判)을 지낸 극정(克正)의 딸인 거창 신씨(居昌愼氏)이다. 註) 내간상(內艱喪):어머니나 승중(承重) 조모(祖母)의 상사(喪事)를 말한다. 참고문헌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동래정씨 정 절공 파보(계축보) ●정종(鄭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