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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 - 봉(追封)된 선경(善卿)과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유(洧)의 딸인 성주 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충좌위부사정(忠佐衛副司正)을 지냈으나 증손(曾孫) 대년(大年)이 이조판서(吏曹判書) 등 정승(政丞)의 반열(班 列)에 올라 귀(貴)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품계(品階), 관명(官名) 등 을 높여주어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曺叅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 (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신좌(辛坐)에 있으며 덕곡면 반성리 만하동에 소재한 이로재(履露齋)에는 공의 신도비(神道碑)가 세 워져 있다. 배위는 지돈영부사(知敦寧府使)를 지낸 자(孜)의 딸인 여흥이씨(驪 興李氏)이다. 참고문헌 : 동래정씨 정절공 파보(계축보), 고령대관(1959년) ●정서(鄭序) 본관은 진양(晋陽)이고 자는 중린(仲麟)이다. 산림처사(山林處士) 월담(月潭 ) 정사현(鄭師賢)과 승문원(承文院)의 정3품 벼슬 판교(判校)를 지낸 조언형(曺彦 亨)의 딸인 정렬부인(貞烈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 다.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다. 일찍이 외숙(外叔)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 출입을 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훌륭하다는 소문이 높았다. 족보에는 임 진난(壬辰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공(軍功)을 세워 부장(部將)과 병절교위 (秉節校尉)에 제수(除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둘째 아들 정상례(鄭尙禮)가 선조(宣祖) 22년(1589년) 기축(己丑) 증 광시(增廣試)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던 사실을 기록한 『기축4월일증광용호방목 (己丑四月日增廣龍虎榜目)』의 가족사항에 ‘부(父) 정서(鄭序) 전부장(前部將) , 안항(雁行 : 형제) 형 정유례(鄭有禮)’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창의(倡義)하 기전에 이미 조선 초·중기에 근간을 이루었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에 속하였 던 종6품 관직인 부장(部將)을 지낸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임진왜란 때 60대 중반의 나이로 창의(倡義)에 동참하여 각종 전투에 참전(參戰)하는 것이 어려 운 현실인 점을 감안하여 아들과 조카 등 7명에게 창의(倡義)에 동참(同參)할 것을 독려(督勵)하였을 것으로 집작된다. 월기(月磯)지역에 거주하였던 진양정 씨(晋陽鄭氏)는 임진란(壬辰亂) 이전에 이미 고령지방의 재지사족(在地士族)으 로서 확고한 입지(立地)를 구축하였음를 알 수 있다. 묘소는 황정산(黃鼎山) 선 영(先塋) 아래 건좌(乾坐)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문소(聞韶) 김황(金榥)이 지었다. 부인은 현감(縣監) 세경(世卿)의 딸인 안동권씨(安東權氏)로 묘는 합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