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page

- 110 - 에 향년(享年) 39세로 별세하자 대부인(大夫人)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준엄 하게 꾸짖어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15세가 된 뒤로는 후에 호조판서(戶 曹判書)가 된 외숙(外叔) 공간공(恭簡公 : 시호) 신거관(愼居寬)에게 공부를 배 웠는데, 외숙과의 나이 차이가 10세 이내였는데도 그를 마치 엄한 스승처럼 대하였다. 중종 26년(1531년) 생원시에 입격(入格)하고 중종(中宗) 27년(153 2 년) 임진(壬辰)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장원급제자(壯元及第者)가 되어 예빈시 (禮賓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는데, 그 당시에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상(喪)을 당하였는데도 임금께서 특별히 어화(御花)를 하사(下賜)하였다. 공은 중종 30년 (1535년) 지평(持平)을 시작으로 장령(掌令)·부교리(副校理)·집의(執義)·직제학 (直提學)·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을 거쳐 중종 39년(1544년) 승정원(承政院 )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명종 2년(1547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시작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한성부(漢城府) 우 윤(右尹)·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호조참판(戶曹參判)·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 司憲)·대호군(大護軍)·한성부(漢城府) 좌우윤(左右尹)·상호군(上護軍)을 거쳐 형 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선조 1년(1568년)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시작으 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며 1572년 6월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1578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삼았는데 사직하였다. 중종·명종·선조 3대에 걸쳐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승정 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 사헌부(司憲府) 대사헌 (大司憲)을 각 2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4회 역임하는 등 충성과 신의와 정 직으로써 국사(國事)를 돌 본 고굉지신(股肱之臣)이자 명신(名臣)이었다. 명종 8년(1553년)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에 승진하여 부모 봉양을 위하여 고을 의 수령이 되기를 청원하여 양주(楊州)를 다스릴 때 재임하는 동안에 군적(軍 籍)을 개정하였는데도 고을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에는 가뭄이 몹시 심하였으나 길에 굶어죽어 나뒹구는 시체가 없었다. 그해 가을에는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어 양주 고을의 주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을 보내어 비석을 넘어뜨렸다. 그 뒤에 주민들이 다시 비석 을 세워 염근리(廉謹吏)로 추앙을 받았다. 청백리(淸白吏)로서, 권신 윤원형(尹 元衡)이 첩(妾) 정난정(鄭蘭貞)을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삼은 데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라는 왕명을 받들고 조사하던 중 윤원형이 이를 알고 뇌물(賂物)로 이를 무마하려 하자 완강히 거절하여 사람들이 후사(後事)를 두려워한 일도 있 었다. 선조 원년(1552년) 무진년(戊辰年)에 임금께서 누가 육경(六卿)의 직임을 맡아서 해낼 만한 사람인가를 묻자 모두들 공을 으뜸 후보자로 천거할 만큼 명망(名望)이 있었다. 선조 11년(1578년) 10월 8일에 대수롭지 않은 병으로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