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page

- 11 - 각각 다른 소리를 내니 어떻게 하나로 통일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 하고, 악 사(樂師) 성열현인(省熱縣人)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여기 에서 보이는 우륵 12곡은 가야 각국의 방언을 일원화한 것으로 각 지역의 음 악을 이해하고 이를 기본으로 편곡하여 대가야 국왕의 치적을 찬양하는 곡이 었을 것이다. 노래가사를 짓는 데 있어, 기본적으로 국가 의례의 절차와 규범 및 왕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데, 우륵은 이러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우륵은 520년을 전후하여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대 가야 도성(都城)으로 들어오게 된다. 540년 이후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현실화 되는 가운데 가야제국의 자구 노력은 실패하고, 가야 소국들은 각기 앞날을 예 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가야 내부마저 기강이 문란해지고 외부 위협에 둔감 해지는 등의 정치적 혼란으로 우륵은 신라로 망명하였다. 진흥왕은 우륵을 국 원경(國原京)에 살게 하면서 계속 악사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악곡을 만들 어 진흥왕 앞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고, 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제자들에게 전수 하기도 하였으며 신분적으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의 12곡은 제자들에 의해 5곡으로 정리되어 신라의 대악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정동락, 2009, 「우륵의 생애와 활동」『민족 문화논총』42,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노중국 외, 2006,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 김태식 외 , 2009, 『악성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 구소·우륵문화발전연구회. ●순응(順應) 『동문선(東文選)』권(卷)64,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 善安住院壁記)」에 따르면 순응의 생애 중 정확하게 연대를 알 수 있는 때는 766년 당나라에 유학한 것과 802년 해인사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입 적한 지 100여 년이 지난 900년경에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순응의 전기 를 찬술하였다. 이때 해인사를 창건한 그의 업적이 높이 평가되고, 또 그를 추 모하는 사업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월광태자와 관련된 것으로 전하는 합천의 월광사(月光寺)나 거덕사(擧德寺)는 대가야왕족의 후예들이 선조를 기 리기 위해 창건한 사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해인사 안에는 대가야의 시 조인 뇌질주일을 낳은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가 있 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가야왕족의 후손인 순응과 이정이 가야산신 정견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