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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 다. 적성현감(積城縣監)을 지낸 지형(之馨)과 판윤(判尹)을 지낸 선(銑)의 딸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광해군 12년(1620년)에 태어났다. 인조 20년 (1642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효종 2년(1651년) 식년 (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사과(司果), 병조좌랑(兵曹佐郞) 겸 춘추관기사 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하동현감(河東縣監)으로 재임중 31세에 관아에서 현 종 1년(1660년) 향년 41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창녕 용장호 갑좌(甲坐)에 있 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23세에 등과(登科)하여 사람됨이 경중(敬重)하여 장차 재상(宰相)이 될 재목으로 지목되었으나 일찍 죽어 모두들 애석(哀惜)해 했다. 배위는 목사(牧使) 석무(錫武)의 딸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귀암선생문집(龜巖先生文集) 전의이씨 부정공파보(경인보) ●이현룡(李見龍)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성백(誠伯)이고 호는 죽포(竹圃)이다. 선조 초에 유일(遺逸)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 지 않았던 근재(謹齋)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딸인 공인(恭人) 회산 황씨(檜山黃氏) 사이에서 선조 13년(1580년)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용담(龍潭 ) 박세호(朴世豪)와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인조 5 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창의(倡義)하여 의려(義旅)를 이끌고 충주에 이르렀으나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척화(斥和)하는 소장(疏章)을 지어 상경(上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고령의 의장(義將) 이현룡(李見龍)은 소모(召募)하는 일에 진심으로 하였고 또 그 사람됨이 백집사(百執事)의 임무를 갖추었으니 청컨대 관리를 선 발하는 부서인 전조(銓曹)로 하여금 드러나게 기록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 다. 인조 13년(1635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으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또 창의(倡義)하였으나 ‘성하(城下)의 맹 세((盟誓)’가 있었으므로 통곡하고 돌아왔다. 후에 사정별제(司正別提) 주부(主 簿)로 역임하였는데 상국(相國) 이경석(李景奭)이 천거하여 인평대군(麟坪大君 ) 의 사부(師傅)가 되어 교도(敎導)하였다. 인조 23년(1645년)에는 출재(出宰)하 여 군위(軍威)·대흥(大興)·유화(儒化)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는데 고을마 다 공이 학문을 흥하게 하여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효종 5년(1654년) 3 월 26일 향년 7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관동촌후(館洞村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