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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 모병(募兵)과 유지(維持)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왜군과의 최초 접전(接戰)인 풍곡리(楓谷里) 전투의 승전(勝戰)으로 인하여 6월로 접어들 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짧은 시간에 많은 의병을 모병(募兵)함에 있어 적지 않는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에 고령대장(高靈代將)으 로 참가한 정상례(鄭尙禮)와 함께 각종 전투에 참전(參戰)한 임난전공(壬亂戰 功)으로 조선시대 무신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명(品階名)인 절충장군(折 衝將軍)을 제수(除授)받았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산 31-1번지 조고(祖 考) 영계하(塋階下)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註)치계(馳啓):말을 달려 와서 아룀. 참고문헌 : 농산세헌(農山世獻) 유사(遺事), 선조실록, 여주이씨문순공파세보 (병신보), 기축4월일증광용호방목(己丑四月日增廣龍虎榜目) 등 ●이천익(李天益)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영지(令之)이고 호는 죽재(竹齋)이다. 성종 때에 무 과(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장(部將)을 지 낸 성(成)과 내금위(內禁衛) 보공장군(保功將軍) 행(行) 충무위(忠武衛) 부사용(副 司勇)을 지낸 기(璣)의 딸인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성종 22년(1491년) 태 어났다. 천성이 고매((高邁)하여 일찍 덕기(德器)를 이루었다. 정암(靜菴) 조광조 (趙光祖)의 사숙제자(私淑弟子)로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곡하며 아래와 같은 만사 (輓詞)를 지었다. 事業文章望(사업문장망) 학문과 문장으로 명망이 있어서 程失後一覽(정실후일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로는 이 분 뿐이었네 承顔不幾日(승안불기일) 만나뵌 지 얼마되지 않았으며 受敎間何年(수교간하년) 가르침 받은지 몇 년되지 않았네 堯舜君民願(요순군민원) 요순시대(堯舜時代) 즉 태평시대(太平時代) 만들기를 원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