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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 당문학(政堂文學) 조년(兆年)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 , 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인민(仁敏)이며 5형제 중 장남으로 공민왕 11년 (1362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의연하고 어려서부터 아 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16세인 고려 우왕(禑王) 3년(1377년) 정사(丁巳) 정사 방(丁巳榜) 동진사(同進士)에 합격한 후 경순부주부(慶順府注簿)에 보직되고 , 그 뒤 사헌지평(司憲持平)·성균사예(成均司藝)·전교부령(典校副令)·종부영(宗簿 令)·밀직사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등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제학(藝文提學 ) 을 지냈다.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知申事)로서 개국 공신(開國功臣) 3등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중추원도승지 (中樞院都承旨)·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조 6년(1397년)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정종 1년(1399년) 중추 원사(中樞院使)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임해 왜구의 침입을 격퇴시켰다. 1400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이어 삼사 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을 도와 태종 1년(140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 이 되고,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대제학(大提學)을 거 쳐, 이듬해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 동활 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1405년 육조의 관제(官制)가 정해지자 처음 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407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 察理使)·영흥부윤(永興府尹)이 되고, 이어 찬성사(贊成事)로서 대사헌(大司憲)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 하고, 1410년 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로서 덕릉(德陵)·안릉(安陵) 등을 함 흥으로 옮겼다. 1412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진봉되고, 1414년 우의정 (右議政)에 승진되어, 진하사(進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黃 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 뒤의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 치되었다. 세종 4년(1422년) 풀려 나와 고령인으로 최초 1424년 영의정(領議 政)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다. 세종 13년(1431년) 졸(卒)하였으며 묘소는 고 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있다. 성주의 안봉서원(安峰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는 ≪형재시집≫이 남아 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섬기자 고려 절의파들이 자신의 배신적 처신을 공격하자 자기의 소회(所懷)를 피력하여 읊은 유명한 오로시비(烏鷺詩碑)가 묘소앞에 서있다. 까마귀 검다 하여 백로야 웃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