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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 侍講院) 설서(說書)·예문관검열·대교(藝文館檢閱·待敎)를 역임하였다. 1621년에 사헌부(司憲府)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자 백형 이지영(李之英)과 함께 휴수동귀시(携手同歸詩)를 남기고 낙향(落鄕)하였 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다시 등용되어 예천군수(醴泉郡守 ) 가 되고, 계속하여 정주(定州)·김해(金海)·창원(昌原)·파주(坡州)의 목사(牧使)를 지냈다. 그 뒤 병조참의(兵曹參議)·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장 장현광(張顯光)의 막하(幕下)에서 군량 (軍糧)의 조달(調達)에 힘썼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의병(義兵 ) 창의(倡義)를 독려하는 호소사(號召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호서(湖西)에서 1천명을 모병(募兵)하여 진군(進軍)하였으나 1637년 1월 30일 인조(仁祖)가 굴 욕적인 삼전도화약(三田渡和約)을 맺자 파군(罷軍)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병을 지휘하여 왕을 호종(扈從)하기도 하였다. 효종 5년 (1654년) 함양군수(咸陽郡守)로 있다가 안렴사(按廉使)의 배척을 받고 영해(寧 海)에 유배되었다가 풀린 뒤로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산(茶山)에 머물며 한적 하게 지냈다. 현종 7년(1666년) 2월 졸(卒)하여 묘는 화원(花園) 서촌 오좌(午 坐)에서 1996년 11월에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산 27-1번지 임좌(壬坐)로 이장 하였다. 초취(初娶)는 영(覮)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고 재취(再娶)는 주부 (主簿)를 지낸 성운(聖運)의 딸인 진주하씨(晋州河氏)이다. 유고(遺稿)로 다포집 (茶圃集)이 있으나 전성세고(全城世稿)에 합간(合刊)되었고 도사(都事) 장복추 (張福樞)가 지은 행장(行狀)과 판서(判書) 이무(李袤)가 찬술(撰述)한 묘갈문(墓 碣文)이 있다. 註1) 휴수동귀시(携手同歸詩):광해군(光海君) 말기에 조정이 극도로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棄官) 고향인 하빈면 하목리로 돌아오면서(歸鄕) 백형 이지영(李 之英)과 손을 붙잡고 이별하면서 함께 읊은 시를 말한다. 註2) 호종(扈從) :임금의 행차 때에 어가(御駕) 주위에서 임금을 모시는 사람 또는 그러한 행위.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국조방목,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이직(李稷)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자는 우정(虞庭)이고 호는 형재(亨齋)이다. 증조는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