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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박상건 唐津文化院 2.송재만(宋在萬) 송재만은여산송씨(礪山宋氏)로시조(始祖)유익26세손(惟翊26世孫)으로2일서산군이북 면내리에서 출생하여한문수학을하였다. 1906년14살되는해에당진군대호지면조금리364번지에이사와살면서대호지면사무소 직원으로취 직하였다.면행정을보면서일제의압박과강합이한국민으로서는더이상참을수없는 인간이하의 굴욕임을알게되었다. 더우기일제의군국주의와한국에대한무단정책은노비이하의수탈과학대뿐임을절감 하였다.1919 년당시28살인송재만은서울에서3.1독립운동을비롯하여전국각지에서독립시위운동이 일고있음을 듣고조국을하루속히독립하여야되겠다고굳게다짐하였다. 면장이인정(李寅正)과도만나비밀리에상의하였고또한병사(兵使)손자남주원과도 숙의(熟議)가 되었다.즉이인정은원로지도자로,남주원은청년지도자로,송재만은행동총책으로활동하 기로묵계가 되었다. 송재만은면직원이기에면내각부락을다니며여론을듣기도하며여론을퍼트리기도 하는일에는 당시로는적격이었다.그뿐아니고많은동지를규합하고조직을확대하는데주동자가되었 다. 송재만은우선시위운동의효과적인성공을위하여면장과묵계가됐으니면직원과합동하여공모(共 謀)하는것이좋겠다고판단하여거사1차모의동지(擧事1次謀議同志)로당시면서기김 동운,상태원, 민재봉,이대하와공모하였고거사2차모의동지(擧事2次謀議同志)를확대하여비밀결사조 직으로독립 운동추진위원회(推進委員會)를결성하였다. 모든계획은비밀리에계획대로착착진행되고있었다. 1919년4월2일서산군대호지면서기김도운,강태원등과함께대호지면주민을규합하 기위하여면 장이인정명의의공문서를만들어각부락의이장에게「도로수선병목정리의건」이라고 제목하여4 월4일이른아침부터각리양정구역의도로를보수하라고기재한공문서를직접교부(直接 交付)해각 이장에게그뜻을전하게하고4월3일밤에는조금리364번지에서송재만과이웃에사는 한문서당(漢 文書堂)한석운(당시42세)선생을초청의뢰하여군중에게나누어줄애국기가될만한 문건(文件)의 필요성을함게느끼고가사(歌詞)를저작(著作)하여약1000매를등사해놓고다시자기집 에가서상의 (上衣)옷감으로준비해뒀던광목3자(90㎝×135㎝)로대형태극기를만들어두고4월4일 (음3월4일) 9시경대호지면사무소앞에모이니면장이인정은대한독립운동의필요성연설을마치고 송재만이자 작(自作)한국기를앞세워이인정과함께앞장서서시위를하면서면광장(面廣場)또는도로 에서애국기 1000매를나누어주고천의시장을누비며독립만세를하늘높이몇번이고외쳤다. 그날오후4시경해산할무렵화렴만드는염건피장부근에서천의주재소근무우에하라 순사,순사보 이재영과당진응원순사2명(늬미야,다까지마)가송재만및군중(群衆)이가지고있던대형 국기를압수 하고자하니송재만은이에응하지않자당진응원순사가1~2회권총을발사하므로그때부 터평화적인 시위를하던군중은격앙되어송재만이앞장서서「이놈들은총을쏘아우리를해(害)하 고자한자들 이므로타살해버리자」고거듭거듭소리쳐선동지휘하고송재만은상원(우애하라)순사 를구타하고 주재소로도망하는순사를쫓아가기물을파괴하며다시다지리(일인)집에들어가이대하 와함께엽총 1정과권총1정등무기를탈취하여제2의거사(擧事)를획책하게되었다. 이무기는사성리이대하(李大夏)집에서모두집합하여적서리수풀에감췄고다시사성 리남주원집 에들렸다가남세원집의자전거를빌려타고송전리민재봉집에서제2의거사모의(擧事 謀議)를했으 나홍성수비대의탄압으로실패로돌아가무산되었다. 그는대호지면민의독립운동동지중에서는경성복심법원에서최고형인5년형을언도받 았다. 그가또유명하게된것은왜경의악독한고문에도굴하지않고행동총책답게「모든책임은나에게 있다.거사계획부터당일시위의주동에까지나의단독행위이다.다른사람은죄가없다 죄없는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