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page

편저:박상건 唐津文化院 이러하였으니,자손들이온존하게있어독립유공자로서추서의신청을하기란어려운사정 이니누락되 는것이무리가아니다.다만우리국민의애국심에도문제가있다하겠다. 7.대호지․정미(大湖芝․貞美)에서일어난 제2차독립만세운동(第2次獨立萬歲 運動) 1919.4․4대호지독립만세운동후속운동으로서이날저녁송전리민재봉(閔載鳳)집에서 재거사하기 로한날이4월8일이었다. 4월8일대호지면송전리,조금리(大湖芝面松田里,調琴里)에서독립시위운동이재봉기 되니본래대 호지는불온하기로유명할만큼경계강화하던때이니경관6명,보병2명을급히출동하여 송전리(松田 里)에서6시경300명(일본기록에는20명)이시위하므로발포하여사상자2명을냈고,조금 리(調琴里)에 서도7시경300명(일본기록에는70명)이독립시위하므로발포하여사망1명,상해1명의 피해를주고 많은애국지사가검거되었다.그리고정미면수당리(貞美面壽堂里)와여미리(餘美里)에서도 민재봉(閔載 鳳)씨댁에서의약속대로4월8일밤10시경이고장선비이며정씨문장(門長)인55세의정 원환(鄭元煥) 중심의300명(일본기록에는수당리에서300명)의시위군중이봉기하여경관4명,보병2명 을급파하여 발포함으로서사망자를1명내기도하였다.그러나피해는그밖에도정원환(鄭元煥)의고문 을비롯한많 은사람이곤욕을당하였다. 당시(1919.4.10보고)일본조선군사령관및조선헌병사령관이일본육군대신(陸軍大臣)에 서보고한자 료에의하면8일충남서산군정미면수당리에서300명의폭민봉기로경관4명군인2명이 급히보내어 발포로1명사망하고서산군대호지면내에불온하여주재했던경관6명,보병2명을출동 시켜송전리 (松田里)에서20명이폭행하여발포하여사상(死傷)2명을냈고대호지면조금리(調琴里)에 서70명이폭 동을일으켜발포하여사망1명,부상1명을냈으나일본인은피해가없다고기술보고하였 다. 8.경찰주재소(警察駐在所)와보통학교(普通學校)세움 경찰,헌병수비대는밀정을두어상호기맥(氣脈)을통하여야경변장(夜警變裝)등을통 한한국민의 탄압은숱한비극과고난을남기고우리의독립운동거사는억울하게억눌리고말았다. 왜관헌에서는 서해오지의이름도잘모르는대호지(大湖芝)의거사에눈을동그랗게떴다.왜놈들은즉 시대호지에 경찰관주재소를두었으며도내(道內)에서도가장악명높은왜경을주재시켰다.그리고조금 이라도놈들 의비위에거슬리게보이는자는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낙인을찍어불령선인명부에 올렸다.그리 고아무런이유도없이그들을탄압하였다.그리고타면(他面)에비하여5~6년앞서대호지 면에조금보 통학교를세웠다.소위선무정책이라고나할까?그러나그것도황국신민정신(皇國臣民情神 )을넣어주기 위해서였다. 서당을폐쇄하고학교에나가도록강요하기위함이었으나애국선열일부에서는학교나가 는것을시대 의추세로보아환영할일이라고생각하여적극추진하였으나다른일부에서는왜놈들에 대한악감정 (惡感情)이극도에이른탓으로왜놈교육시키는학교에는자녀들을보내려하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