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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박상건 唐津文化院 개군에파급되었다.그리고본도의만세운동은3월중순에들어서면서과열하는듯하다가 는곧식어버 리고하순에재연(再燃)되더니3월31일부터4월8일까지그절정기였다. 본도에서는기독교도와천도교도가만세운동을주도한몇곳을빼고는,거의가농민들이 주동한것같 다.물론학생이나혹은광산노동자가주체가된곳이없는것은아니다.또이지방의만 세운동은충 북의그것과비슷해서자못격렬한것이었으나,반면에밤중에가까운산에올라가봉화를 올리고만세 를부르는등다른도보다는특이한양상을보이기도하였다. 4월1일천안군아우내(並川)장터에서일어난만세시위운동은충남지방에서첫째로손꼽 히는운동이 었다.천안군동면(東面)에서는기독교전도사조인원(趙仁元)을주동으로해서,아우내장 날을기하여 운동을일으키기로하고그준비를서둘러왔으며,이와는달리인근면인수신면(修身面) 에서는그지 방에서학식과덕망으로주민의추앙을받는김상훈(金相勳)이주동이되어밤바다각마 을근처의산 봉에서봉화운동을벌이고있었다.그러다가이두면의주동자가서로연결되어4월1일 아우내장날 에합동으로만세시위를벌이기로하였다.그리하여이날밤자정(子正)을기해서다음날 의운동을알 리는봉화가요소마다올랐다. 약속된날이밝았다.천안군일대뿐만아니라멀리충북의청주,진천,방면에서도장꾼과 장꾼을가장 한운동자가아우내장터로몰려들기시작하였다.이날오전9시경에는벌써3천여군중이 장터로몰려 들고있었다.거사계획은순조롭게진행되어큰태극기가긴장대에매달려지고,그아래에 서독립선언 식이열렸다.운동의총지휘자조인원이독립선언서의낭독을끝내자군중은장터가떠나갈 듯「대한독 립만세」를불렀다.이어서군중은태극기를선두로만세를부르면서헌병파견소쪽으로행진 해갔다. 이때16세의이화여학교(梨花女學校)생도인류관순(柳寬順)이미리만들어온태극기를장 꾼들에게나 누어주었다. 시위군중은평화적인행진을계속하면서만세를불렀다.그런데앞서가던시위대한사 람이일본헌 병의칼에찔려피를토하고쓰러졌다.이광경을본군중은술렁대기시작하였고,시위대 는최초의희 생자를둘러메고헌병파견소롤몰려갔다.시위군중은무참하게살해된동지의시체를파 견소앞마당 에메어다놓고일제의만행을성토하였고일부과격한청년들은파견소뒤로돌아가서전 화선을끊기 도하였으며,폭력으로대항하기도하였다.사태가이렇게험악해지자일본헌병들은겁에 질려서파견 소안에들어가숨어있었다.얼마뒤에는지휘자조인원의만류와설득으로큰충돌없이 차아평온을 되찾게되었다. 그러나일본의경찰과헌병은갑자기발포하기시작해서그첫탄환에조인원이쓰러졌다 .일본헌병 의계속되는발포로군중은일단후퇴하지않을수없었다.얼마쯤지나서군중은다시몰 려들기시작 했고,또다시「대한독립만세」를외쳤다.그런데오후2시가지나면서뜻밖에도천안에본 부를두고있 던헌병20~30명이트럭을타고출동했다.그들은트럭에서내리자마자시위군중을향 해서무차별 사격을감행하였다.군중은다시흩어져달아났지만일본헌병대는달아나는군중을추격 하면서그등 뒤에다마구발포하였고,혹은칼로찔러쓰러뜨렸다.순식간에장터는칼과총에맞아피 투성이가된 시체와중상자가즐비하게널려졌다.이때에피살된사람은류관순의부모를비롯해서모 두14명이나 되었고그밖에도중상자가많았다.그런데중상자중에서도그뒤에여러사람이죽었다고 한다. 한편일경과헌병은달아나는군중을뒤쫓으면서주동자색출에혈안이되었다.그리하여살아남은주 동인물은그들에게검거되어모진고문과곤욕을받았으며,조인원과류관순등수십명 이재판을받 고서징역을살았다.그런데16세소녀류관순은옥중에서도끝까지항거하다가마침내는 참혹한죽음 을당하고말았다. 이밖에도3월20일과28일의두차례에걸친천안군입장(笠場)의만세운동은각각양대 여숙(良垈女 塾)의여학생과직산금광(稷山金鑛)의광부가중심이되어격렬하게전개되었다.그리고, 4월4일서산 군대호지면조금리와정미면천의(天宜)에서는이인정(李寅正),송재만(宋在萬),남주원(南 柱元)을비롯 한대호지면민중심약1,000여명의시위대가정미면면사무소로행진해가서면장으로하 여금만세를 부르게하는한편,경찰주재소를습격해서전부파괴하였다.이충돌로당시의일경3명중 2명이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