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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박상건 唐津文化院 했다. C.소난지도(小蘭芝島)150의병운동 서해안작은섬외딴바닷가에묻혀있던한말의병들의피맺힌항일투쟁사가뒤늦게발굴 되었으니이 는충남당진군석문면난지도리소난지도산21번지이섬의동쪽끝인둠바벌바닷가의의 병총이다. 석문면북쪽교로리에서물길로약5㎞,배를내리면벌판위에50여평남짓한묘역이눈에 뜨이고「의 병총」이라고새긴비석뒤에초라한봉문이서있다.「1907년을사조약에반기를들고국권 을회복하고 자왜군과싸우다가장렬히순국하신홍일초(洪一初)휘하150여의병이고이잠든곳」이 라는비문이 의병총의역사를말하여준다. 이는국운이기울던한말,국권을찾고자경기도수원에서홍일초를중심으로일어난의 병들은한때 는포군(砲軍)을거느릴정도로세력이컸으며다른의병부대와함께유격전술로일본군에 게큰타격을 주고전과를올리는투쟁을하다가일본군의초토화작전에쫓겨서남양만일대풍도,국화 도등지에서 활약하다가충남당진․서산방면으로건너와전열을가다듬고다시항쟁하였다.이들은이 곳에서1906 년병오(丙午),홍주(현홍성)전투에서패한의병들과합류〔당진출신최모(前一唐津鄕史 최진원의아 들이라전함)가이끄는부대〕하여소난지도로본거지를옮기니그수는도합150여명이었 다. 당시이곳은해상활동의중심지라호남지방에서거두어들인조세미인세미(관곡)을서울마포에있는 경창으로운반하던배들의정박지였으며겨울철에한강이얼면강물이풀릴때까지머물렀 던곳으로홍 일초부대가이곳에주둔하게된것은세미를탈취해식량조달을용이하게할수있고또 육지와멀리 떨어진섬으로적을방어하기편해신변의안전과후일의재기를도모하기위함이었다. 그러나이소식을탐지한일본군은1909년기유년음력2월12일솔가지실은배(松炭船 )로위장한1 개소대병력을침투시켜소난지도남쪽선창가를기습하였으니전투에익숙하지못한의병 들은이에맞 서총격전을벌이다가먼저화약이떨어졌고이틈을탄일본군이다음날아침에상륙하자 의병들은최 후의순간을맞아끝가지육탄전으로대항하여섬동쪽으로밀려나면서도조금도굴함이없 이최후의1 인가지장렬하게산화하였으니이곳섬주민들사이에전해지는바로는「온종일총소리와 비명이천지 를진동시켰으며화약연기가온섬을뒤덮었다고한다.심지어어떤부인은아기를업고피 난간다는것 이너무나급해서옆에있던베개를업고갔었다고하며격전지맞은편은당진군석문면교 로리와초락 도리,그리고서산군대산면삼길포에까지의병들의시신이떠밀려왔다」고전해지고있다 .이렇게우 국충정으로뭉친애국지사의병들은살신성인진충보국(殺身成仁.盡忠報國)의정신으로,침 략을감행한 일제에대항하여우리민족의굳센자주의식을온천하에부각시켰으나,비록소난지도장 안여외딴섬 바닷가의전투였지만의병들이바친고귀한목숨은참으로의기충천한장렬한거사가아닐 수없다. 이들의시신일부는바닷물에떠내려가고기밥이되었고일부는그물이나발에걸려곳곳 에가매장이 되었고남은시신은그곳소난지도주민들에의하여장안여격전지앞둠바벌바닷가에웅 덩이를파고 매장하였는데,그후돌보는이가없이그빛나는항쟁사만이전설처럼구전되어오다가그마 저세월과 함게잊혀진상태였고격전지바닷가에는바닷물에씻긴유골이간간이나와뒹굴고있었 으며유골이 약재가된다는미신에현혹된일부몰지각한주민들이의총을도굴해유골을가져한흔적 인구멍이있 어보는이로하여금찢기워진역사의한자락앞에서절로비통함으로가눌길없게하였 다. 이의병총의역사가다시빛을보게된것은지난1970년석문중학교신이균이사장과김부영교장이 현지를답사하고이곳을정화보수한데서부터시작되었다.그후석문중학교(石門中學校)에 서는신양웅 (申良雄)등교직원및학생들로하여금선열의얼을본받고애국심을고취하는정신의도장 으로삼고자, 현지주민들의협조를얻어흩어진유골을수습하여1974년6월에봉군을새로만들고식 수도해놓고 매년현충일에는교직원및학생대표들이참배해오고있으며보이스카우트대원들은여름 방학이되면 정화작업을해오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