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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 논산의 어제이야기 다만 형님 내외분이 지극하신 예수교신자이며 큰 장로님으로 근동에 서는 통하는 어른이시기에 그래도 편안히 함께 지내게 되어 근 10여일 지내던 중에 1․ 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갔던 사람들이 지독한 고생만 하고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기에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우리 마을에도 이미 10명이 집에 돌아와 있었다. 매일 한 두 사람씩 돌아오다 보니 거의가 다 돌아오고 섣달그믐(음력 12월 말일) 까지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셋집 뿐 이었다. 그 셋집만 가장들이 돌아오지 않아 우울한 설을 쇠게 되었다. 이렇게 설을 지낸 후 정월 9일에야 나머지 세 사람이 무사히 다 돌아 와서 동네는 잔치분위기였다. 지금에 와서 회고 해 보면 전쟁의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1․ 4 후퇴의 고생은 거의가 인재에 의한 고생이라고 생각된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맨몸으로 낙동강 물을 두세 번 씩 건너갔다 다시 건너오고 했던 일들이라든가, 후방부대에서 인솔하는데 착오로 인하여 갔다 왔다 한 조처라든가, 보급품 부족으로 인한 고통을 받은 일이라든 가, 맨몸으로 강을 건너지 않으려고 높은 철교위로 올라가면 헌병(미 군, 국군)의 만행으로 갈취당한 일이라든가, 등 등 사람으로서는 차마 하면 안 될 혹독한 고생들이 거의가 인재로 연유된 것들은 피차가 무지 한 연유로 시련을 받게 되었으니 왜 인재가 아니겠는가? (훗날 방위군 사건이란 일대 큰 사건으로 고위급의 사형까지 있었으니 인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우리들은 그날의 쓰라린 수모와 고생을 사실대로 기억하여 훗날 강국과 부국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을 위한 믿거름이 되 기를 바라며 6․ 25와 1․ 4 후퇴 의 잔인한 추억을 모름지기 간직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