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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논산의 어제이야기 그런데 집에 와보니 전에 민애청 하던 간부들은 다 죽고 잡혀가고 하여 특별히 누굴 만나거나 할 사람도 없고 하여 며칠을 빈둥빈둥 지냈다. 그러던 중 면 인민위원회에서 나오라고 하여 나갔더니 북한 김일성 대학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대학 예비입학생으로 차출되어 대전에 집결하여 15일 정도 간부 교육을 받았다. 대전에 가보니 각 읍면에서 1명 씩 차출된 것이었다. 그런데 교육을 받고나서 천안의 목천면에 나가 토지개혁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낙동강 전투에서 밀리고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고 하니 우리들을 북한의 김일성대학에 보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 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불 리해진 공산당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소(小) 집단 별로 피신하여 기다 리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논산의 경우는 9.28 서울 수복 후 수세에 몰리게 된 상황에서 노동당 논산군당을 중심으로 당의 조직인 군(郡)인민위원회, 군농민동맹, 군민 주여성동맹, 군민주청년동맹 등에 소속된 약 500여 명이 처음에는 대 둔산 자락인 양촌면 오산리에 집결 하였고 2일 후에 벌곡면 수락리로 이동 하였다. 이때 미처 북쪽으로 후퇴 하지 못한 인민군 약 1,500명도 대둔산에 집결하여 전체 약 2,000여명이 집단생활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한 열흘정도만 피신 해 있으면 다시 공산당 세상이 된다고 하여 그렇게 믿고 있었다. 당시 노동당 충남도당은 벌곡면 덕곡리 중보실 이라는 마을에 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