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page

22 / 논산의 어제이야기 그 분들은 그렇게 묘치레를 한 대요. 그리구 저 은진 송씨들은 또 집짓는데 그렇게 재물과 정성을 다 한다 네요? 사당이나 종가 재실 이런 집들을 많이도 짓고 또 마루 난간이나 이런데 아주 아름다운 조각도 하고 이래서 집을가지고 그렇게 자랑을 삼는 집치레를 한다구 옛 어른들께 얘기를 들었어요. 각제비12) 는 현재 우리집(종가) 대문 앞에 서있는데 원래는 연산역에 서 종가로 들어오는 입구인 수정리(현재의 계룡 정심원 입구 근처의 소 로길)에 세웠는데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며 약 30여 년 전에 우리집 앞으로 옮겼어요. 각제비의 비문은 시아버님께서 쓰셨다고 해요. 시집오기 전 동네서 정신대 많이 끌려갔는데 나는 셋째 삼촌이 면직 원이어서 그 덕을 봤는지 안 끌려갔어요. 우리 종가는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유명 선비 집안이라서 일본인들로 부터 남들보다 우대를 받았다고 해요. 종가의 제기(祭器)는 일제 말기에 무기 제조를 위한 쇠붙이 강제 공 출 있을 때도 산속의 구렁텅이 등에 감추고 없다고 하여 빼앗기지 않고 오늘날 까지 잘 보존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다른 종가들 중에는 제기를 빼앗긴 곳이 많이 있다고 들 었어요. 12) 각제비(却祭碑): 일제 강점기 일본 통치자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유명한 선비 집안의 제사에 총독부에서 보내온 제물을 가지고 관리 가 참례를 하고 다녔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불천위 제사에도 참례 하러 왔는데 왕당 김용승 선생이 그 일본인들에게 “당장 물러가라” 고 호통을 쳐서 쫒아 보냈다. 이 일로 김용승 선생등 몇 사람이 구 속되어 문초를 받는 등 고생을 겪었다. 이러한 사실을 후세에 길이 남겨 교훈으로 삼고자 1971년 김윤동 민태식 등 11명이 발의 하고 박인규가 비문을 짓고 김순동이 써서 비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