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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 논산의 어제이야기 4. 우당 강세형의 계몽운동(愚堂 姜世馨의 啓蒙運動) 강세형은 진주인으로 의영(義永)의 넷째 아들로 서기 1885년 11월 29일 논산시 가야곡에서 태어났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일 때 예범이 어른과 같았다. 관 21세에 광무을사 별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다. 서기 1910년 한 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조 국이 실력양성하고 자주할 수 있도록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래서 김성 수(金性洙)와 함께협성실업학교를 세워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2년에는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시대일보와 중외일보를 창간하여 언론의 자유를 펴고 그 후 조선일보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강륜(綱倫) 회복을 위해 필봉을 휘둘렀다. 1914년 중국 북경에서 열리는 만국 변호사회의에 조선대표로 참석 하여 왜정(倭政)의 비리를 규탄하여 세계법조계의 관심을 각성시켰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약하고 있는 신익희(申翼熙)와도 비밀리 에 회합을 가졌었다. 또한 안창호(安昌浩)선생과 해아(海牙 )밀사사건 의 수습을 위하여 同友會를 조직하고 왜정의 무법 만행을 만방에 호소 하고 애국지사 이인(李仁)선생을 비롯한 구금자들의 구출을 위해 법정 투쟁에 앞장섰다. 광복 후 이 인, 유진오(愈鎭午 )등과 함께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만 들었으며 조야 법조계의 추천으로 제헌국회에서 반민특위재판장(反民 特委裁判長)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50년 이후 각급 학교 기성회 총연합회장으로 일 했으며 국학대학장으로 있으면서 후진양성에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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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