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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 논산의 어제이야기 그 해 5월 청국의 동순태(同順泰) 상표와 일본은행권의 국내 유통을 적극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일으키자 양국은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주 모자의 처벌과 손해배상을 요구 하였다. 1905년 51세 때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국가의 위급을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살포하며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 5적의 처형을 요 구 하였다. 이듬해에 선생은 농상공부장관과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민중을 교도하려고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 進敎育會)를 창입하고 풍속을 선도하며 국권 회복의 애국운동을 펼쳤다. 1907년 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동우회를 창립하니 황실 존중과 동양 평화와 청년교육이 삼대강령이었고 그래서 수 개월이 채 못 되어 회원이 수천명에 達했었다. 해아밀사사건에 이어 고종 양위와 군대 해산으로 국운이 어두워지자 동우회원들이 앞나서 일경과 싸운 끝에 선생은 회장 으로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54세 정월 내란죄라는 평리원의 판결로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더니 2년이 지나 1910년 9월에 망국 후 풀려 나 왔다. 1913년 9월에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독립 의군부는 의병들이 무장하여 투쟁하는 독립군단체로 서울에는 중앙순무 총장이 있고 각 도에는 도순무총장이 있고 각 군에는 군수, 면에는 향 장을 두어 일제식민 통치를 거부하고 비밀리에 독립 정치를 주장하는 단체로 세계에 알리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하는 단체이다. 선생은 1914년 4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거듭 영어의 몸이 되었고, 풀려 나왔다가 다시 오, 육년 후 광복의 뜻을 품고 북만주로 향하던 도중 북 청에서 선조 문숙공 관의 현몽으로 결심을 굳혔으나 불행이도 일본 경 찰에 다시 체포되어 경성으로 옮겨와 갇혔다가 이른바 회유정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