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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2월28일 수요일 6 (제134호) 관향조 종친회 광주광역시 서 구 서창동의 절골 마을은 충주박씨 문중의 세거지로 서 올 해 입 향 5 6 2 년을 맞는다.절골 마을은 사동(寺 洞)이라고도 하며 서창동의 1번지이 다. 서창동의 25개 통중에 제1통으로 조선말 일제강점 기 이전까지 서창 의 소재지였다. 마을 앞에는 큰 방중이 있었고, 방죽에 연화가 피 면 그 향이 그윽하여 마을 이름도 ‘방하마을’이었는데 일제가 ‘절골(寺洞)’로 바꿨다고 한다.실제로 마을 진입로 입구의 큰 도로(회재로)가건설되기전백마교옆에는방죽의둑으로연 상되는보의흔적이있었으나,지금은흔적마저없어졌다. 마을 주민들은 현재에도 그 곳을 ‘방죽밑(아래)’이라고 부 고있다. 마을 뒤로 송학산과 봉황산이 있고 동쪽에 한생이 산이 있 으며 앞쪽에 백마산과 바리봉이 그리고 마을 바로 옆에 나지 막한 동산이 2개 더 있다. 이렇듯 마을 주변을 크고작은 산들 이 포근히 감씨고 있다. 송학산의 유일한 물줄기가 실개천을 형성하고 마을을 가로질러 극락강까지 이어지는데 이 실개천 바닥이 천연암반으로 형성되어 물이 맑아 1급수에만 자생하 는가재,다슬기,비라미,민물새우등이지금도살고있다. 1546년 충주박씨 찬성공 휘 지흥(智興, 1411~1489)이 정착 한 후 그의 후손인 충주박씨가 자작일촌을 이루어 지금에 이 른다. 마을에는 찬성공의 재사 추원재와 아드님 하촌공의 재사00 0, 문간공의 재사 봉산재와 신도비, 마을 입구에 충주박씨의 세거지터임을 얼리기 위한 음각으로 새겨진 새장천(忠州朴 氏阡)과 찬성공의 아들 삼형제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려 이들 을 가리켜 당시 송나라에는 부자삼소(父子三蘇)가 있고 동국 (東國)에는 형제삼박(兄弟三朴)이 있다는 설(說)과 눌재(訥 齋) 상(祥)의 중자(仲子) 진사공 민중(進仕공 敏中)과 육봉 공(六峯公)우(佑)의 두 아들 연파공 개(煙波公 慨)와 문충공 사암 순(文忠公思庵 諱 淳)의 뛰어난 문장으로 인해 이들을 가리켜 다시 일가육문장(一家六文章)이라 하여 이들의 주옥 같은시비(詩碑),눌재박상고고양이전설등이전해진다. 특히 마을입구에서 봉황산으으로 가는 ‘송학누리길’에는 요즈음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어 충주박씨 문중의 뛰어난 선 현들과이를현창하려는후손들의노력이더욱빛나고있다. 註 - 송학누리길은 총7㎞의 구간으로 송학초등학교에서 불암마을, 학 산사, 봉산재, 송학산 등산로와 봉학저수지를 거쳐 조선시대 나주의 영산 창까지세곡을운반하던지역인서창포구(나룻터)가종점이다. 찬성공 휘 지흥(智興, 1411~1489)은 1411년 고려조에 성균 진사로 감찰과 좌랑 의천, 은산군사를 역임한 휘 소(蘇)와 고 령오씨 사이의 오형제중 넷째아들로 충청도 회덕에서 태어났 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 한 것에 격분하여 살 곳을 찾아 남으로 내려와 현 광주 봉황산(鳳凰 山) 아래 집을 짓고 순수함을 보전하며 깨끗이 살았다. 그러 나 학문이 뛰어남을 알고 있는 권람이 수차례에 걸쳐 세조에 게천거하였으나나아가지않고곧은선비의삶을살았다. 찬성공이 충청도 회덕에서 전라도 광주로 이거하는 과정에 득남하는과정의일화가전해진다. 세조를 피해 은거할 곳을 찾아 남으로 향하던 중 전남 장성 입암산 갈재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지자 산막에 들어 하룻밤 을 묵 게 되 었 는 데 꿈 에 산 신 령 이 나 타 나 “내 가 너 의 살 곳 을 일러줄 터이니 지금 밖에 있는 나의 쌍마를 타고 가다가 그 쌍 마가 멈추는 곳이 너의 살 곳이니라. 그 곳에 쌍마 중 한 마 리 를 매어 표를 해두고 오너라.”하였다. 그 쌍마 멈춘 곳이 방마 산이백마산으로바뀌었다고한다. 찬성공이 정착한 뒤 2년 만에 본부인 하동정씨가 죽고 이천 서씨 처녀와 재혼하여 8년 만에 하촌공(荷村公) 정(禎)을 낳 고 , 찬 성 공 의 나 이 6 3 세 가 되 던 어 느 날 부 인 서 씨 와 함 께 고 향을 찾아 장성 입암산 갈재를 넘다 산 아래 산막에서 또 하루 를지내게되었다. 이날 밤 부인 서씨의 꿈에 입암산 위에서 큰 바위가 굴러와 서씨의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이듬해 1475년 5월 18일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찬성공이 이 아이의 이름을 태몽 에 따라 아명을 입암으로 하다 뒤에 상(祥, 시호 문간공)이라 했다.2년 후 셋째아들 육봉공(六峯公)우(佑)를 낳았다.이들 삼형제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려 이들을 가리켜 당시 송나라 에는 부자삼소(父子三蘇)가 있고 동국(東國)에는 형제삼박 (兄弟三朴)이 있다고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광주일대에서는 고봉 기대승의 기씨(寄氏), 임진왜란의병장제봉고경명의고씨(高氏)문중과더불어세 명문가로불리워지고있다. △하촌공 박정의 자(字)는 창국(昌國), 호(號)는 하촌(荷 村),찬성공(휘지흥)의장남이다.성균생원으로학문이뛰어 나 점 필 재 김 종 직 선 생 이 호 남 을 살 필 때 한 번 보 고 기 이 하 게 여겨 예모(禮貌)를 차려 말하기를 “참으로 재상(宰相) 재목 (材木)이다”하였으나 아쉽게도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져아쉬울뿐이다. △문간공박상(1472∼1530)은 연산군 2년(1496) 23세의 나 이에생원시에합격하고1501년 정시문과을과에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거쳤으 며 자원하여 담양부사로 나갔으며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청 백리로 선록(選錄) 되었다. 특히 죽음을 무릅쓰고 신비의 복 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려 대의를 지키고 의로움을 실천했 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시와 문학에 남다른 식견과 조회가 깊 었으며,이조판서에추증되고시호(諡號)는문간(文簡)이다. △육봉공박우(祐) 는 151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병조정 랑 등 주요 관직을 거쳐 강원도관찰사, 우승지, 남원부사, 도 승지,성균관 대사성,병조,이조참의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 관사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며, 아들 사암 박순으 로 인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장과 도덕으로 세상에 빛났으 나 시문이 산일(散逸)되어 중형(문간공)의 눌재집 부록에 실 어졌다.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文臣) 눌재(訥齎) 박상(朴祥)선생 은 이곳 서창관내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희대(稀代)의 폭 군(暴君)이며 패륜아(悖倫兒)인 연산군이 팔도(八道)에 채 홍사(採紅使)를 내려보내 미색을 구하던 중 나주 골에 사는 무한우부리(牛夫里)의딸이 뽑혔다. 얼마 후 그 딸이 후궁(後宮)이 되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 되자 그 아비 우부리는 자못 기세가 등등 제 세상 만난 듯 온 갖 못 된 짓 을 자 행 하니 민심이 날로 흉흉하고 그곳 원 님은 말할 것도 없 고도 관찰사까지도 그 자 의 비 위 를 거 슬리면 목이 달아 나는판이었다. 눌 재 박 선 생 은 불의(不義)를 보고 서는 참지 못하는 의 기 호 협 ( 義 氣 豪 俠)한 성품으로 비 리(非理)를 척결하 기 위 해 전 라 도 (全 羅道)부사(조선조 때 관사(官使)의 감찰과 규탄을 맡 은 관 직 )를 자 원 하 여 부임하였다. 그 런 때 새로 도임 한 그에게 동료나 예 하 이 속 들 이 이 구 동성(異口同聲)으 로 우부리에게 「부 임인사」를 해야 한 다는것이었다. 그 권 유 를 듣 지 않자 사람들은 그 의 전 도 를 걱 정 하 는 형편임에도 눌재는 도리어 부하들에게 엄명을 내려 우부 리를잡아다가곤장으로쳐서죽였다. 그때의 형세로는 실로 엄청난 폭거(暴擧)이며 이변(異變) 이었다. 우부리의 집에서는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사 람을 서울로 급파고변(急派告變)을 하니 대노(大怒)한 연산 군의 명으로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이곳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한편 눌재 선생은 우부리의 죄상을 조정에 알리는 동시 당 당한자세로대죄(待罪)할것을결심하고서울로올라가던중 「장성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야옹 야옹" 소리를 내 며 따라오라는 듯 그의 바지가랑이를 물로 채기에 이상히 여 겨 그 뒤를 밟았다. 그동안에 사약을 가진 금부도사는 큰길로 가게되어 서로 길이 엇갈려 만나지 않고 위기를 모면하게 되 었는데, 곧바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그 사건은 불 문(不問)에붙이게되었다. 註 - 광산구 하남(河南)출장소관내 오산마을에 그 고양이를 제사지내 는 논(묘창답(描倉畓)수십 두락을 두어 정양사(正陽寺)에서 수곡하여 왔 는데해방후국유지로 편입되어버렸다. 충주박씨는 고려부정(高麗副正) 휘(諱) 영(英)을 관조로 모시고 고려조에 8세가 출사하면서 개경으로 옮겨 거주하였 으나,이후 나라가 어수선하고 횡포가 심해지자 관조의 7代孫 고려조 중산대부 민부의랑을 지낸 휘 광리(光理)의 두 아들 진(秦,참의공)과소(蘇,판서공)가공주덕진현가장골(현대 전광역시 서구 도마동)로 은거하여 살게 되어 이로서 충주박 씨의 세거지를 이루게 되었고, 도마동의 추원사에는 관조와 이하칠세의위패를모시고있다. 판서공휘소(蘇)의사형제(인흥,의흥,예흥,지흥)중막내 지흥(智興)은 출세할 수 있는 좋은 여건에서도 낙남 절의를 지키며 1546년 광주 절골마을에 입향 이후 장남 첫째 하촌공 (휘禎),둘째문간공(휘祥),셋째육봉공(휘祐)등삼형제를 훌륭히키우면서명문가의기틀을세웠다. 찬성공의 후예들은 절골 마을을 중심으로 광산구 송정동, 나주증지에큰집성촌을이루고있다. 충주박씨절골마을(寺洞) <광주광역시서구서창동사동마을> 뱚집성촌 탐방 문간공눌재박상의12대손성주(性株) 公이 19 18년 6월 절골마을이 충주박씨 세거터임을 기 리기 위해 마을 입구 바위에 ‘忠州朴氏阡’이라 새겼다. 뱚입향약사 입 향조 찬성공 묘 역(마을 맨뒤 송학누리길 옆에 있다.) 찬성공재사(좌,추원재)와하촌공재사추모재. 하촌공묘소. 뱚눌재선생과고양이 눌재박상의신도비(마을입구). 뱚입 향 조 찬 성 공 의 선 원 세 계 한빛신문의 성손여러분의 구독료와 후원금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 다. 성원에감사드립니다.새로운10년 을위해최선을다해보답하겠습니 다. 성손여러분과 함께 만들어온 한빛신문이 창간 11주년을 맞이하였습니 다. 한빛신문의지난11년은전국성손들의화합과친목을도모하고성씨 신문을 선도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10년은 신라 시조왕의후예라는자긍심을일깨우는역할과후손들에게훌륭한보학의 자습서가될수있도록초심을잃지않고최선을 다 할 것을 다짐합니다. 임직원일동 ▶구독신청및기사제보(광고접수)053-588-7300,FAX581-0067 parkss1012@hanmail.net ▶구독료및후원계좌 453013-55-000691농협 예금주 한빛신문 본보고문박근영(밀원문화연구회회장)100만원 뱚뱚뱛고문박도규(족보문집전문대보사대표)100만원 ※후 원 하 여 주 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