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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2월28일 수요일 2 (제134호) 기 획 필자는 그간 1년여에 걸쳐 븮경애왕의 죽음븯이란 제하(題 下)에 모든 의혹들을 살펴왔다. 이미 발표한 7편의 논문은 물론,장차작성예정인논문의일부를싣기도했다. 이제 필자는 경애왕에 관하여 최다 논문을 발표한 연구자 로 자리매김했다. 지금까지 븮한빛신문븯 지면을 빌어 얘기한 그간의 내용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향후 두 세편의 논문을 추가한 다음에는, 이를 묶어 경애왕 에관한 단행본(학술저서)의출간도계획하고있다. 필자는 지금 이 시점에서 몇몇 면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필자로 하여금 경애왕의 죽음,사단,의혹의 해명에 새 삼나서도록추동한이들이그들이다. 특히 지난달 14일, 영면한 박재원 이사장은 핵심 주역이 었다. 그는 박씨 일문의 먼 장래를 바라보았으며, 역사의 중 요성을익히꿰뚫고있었다. 그와의 만남은 자주 있지 않았고, 만남의 시간 역시 짧았 으나 그는 파사현정의 믿음과 춘추필법(春秋筆法)에 확신 을 지닌 진정한 거인이었다. 그의 영면은 박씨 일문에게 크 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으나, 그가 남긴 궤적은 후인의 길이 되리라믿어의심치않는다. 경애왕연구에적지않은연구비를쾌척해준박씨일문도 떠오른다. 그들의 선견지명과 굳건한 믿음이 없었다면, 경 애왕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는 처음부터 불가했다고 여겨진 다.전술한 대로,신라 왕조를 통틀어 10명의 박씨 왕이 있었 다.경애왕은그중마지막10번째박씨왕이었다. 기록은 경애왕이 927년 한겨울 포석정에 유행(遊行)하여 주흥(酒興)에 빠진 나머지 사태를 분별하지 못하였고,마침 신라에 침입한 견훤에게 체포되어 견훤의 강요로 자살하였 으며, 경애왕의 왕비는 견훤에게 겁간 당했다고 되어 있다. 또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은 궁중의 비빈마저 집단 겁간하는 등 유린과 난행을 일삼았다는 구절도 보인다. 말 그대로 뚜 렷한주홍글씨임이분명하다. 경애왕의죽음은대략1090년 전의 일이다. 한데 븮삼국사기븯가 작심이라도 한 것 마냥,책의 여러 곳에 걸쳐경애왕의향락과무능에방점을찍었다. 그결과오랜세월에걸쳐경애왕은역사에서가장지탄받 는 인물로 자리했다. 경애왕은 고려, 조선을 거치며 숱한 시 인묵객, 지식인, 유학자 등의 줄기찬 조소와 지탄을 받아 왔 다. 숫자조차 헤아리기 힘든 절대 다수는 다투어 포석정의 주연을 목청을 돋우어 힐난하였고, 경애왕 자신의 죽음, 혹 은신라멸망의원인과어김없이결부지어왔다. 일본은 경애왕을 더욱 부각하여 포석정을 븮고적 1호븯로 삼 아 경애왕이 마치 신라 멸망의 원인인 양, 회한의 신라 역사 를 부각시켰다. 일본은 조선의 멸망 원인을 당쟁에서 찾았 듯이,신라멸망의가닥을포석정사건,경애왕에서찾았다. ‘적이 쳐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과 중신들이 질탕 하게 퍼마시고 놀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식민 지로 살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를 조선인들에게 은연 중 심어주려했다. 얼마 전까지 중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읽는 대한민국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경애왕은 방탕의 심볼(Symbol)로 적시되었을정도였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1회편).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남산의 차디찬 곡풍이 불 어오는 포석정에서 술잔치가 있었을 리도 만무하고,경애왕 의 치세는 왕위를 빼앗긴 김씨 일족의 일부가 앙앙불락하며 내란을 선동하던 때였으며, 경애왕의 숙적 견훤이 경애왕 타도를 외치며 군사를 몰아 영천에서 호시하던 백척간두의 때였다.평소 경애왕을 주군처럼 간주한다고 외쳤던 왕건은 철저히 경애왕의 위기에 방관했던 때였다. 보이는 것은 모 두 적뿐이었고, 불리함뿐이었다. 여러 면으로 보나, 경애왕 이 맞이한 절체절명의 시간 속에서 따뜻한 구중궁궐도 아 닌, 사방이 적에 의해 노출된 포석정에서 술을 퍼마시고 해 롱거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 될 사건임 이자명하다. 당시 후삼국의 군세는 1강(견훤) 1중(왕건) 1약(경애왕) 의 형세였고, 강한 견훤에 대항해 나머지 둘의 합종이 진행 된 상태였다. 그러자 견훤은 약한 경애왕을 거세(去勢), 동 맹의 한 축을 무너뜨려 힘의 우위를 결정지으려 획책하였 다. 927년 9월 견훤은 경북 내륙으로 북상한 다음, 전격적으 로 예봉을 남쪽으로 선회, 영천(고울부)로 향하였다. 견훤 의 칼날은 일각일각 서라벌, 보다 정확히는 경애왕을 향하 였던셈이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2회편). 경애왕이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까지 왕건은 선제 적대응을취하지않았다. 왕건은사태를방관하고있었다.심지어경애왕의구원요 청이 있을 때까지 왕건은 견훤의 침입을 몰랐던 것처럼 가 장하기도 했다. 927년 9월, 경애왕의 죽음을 부른 견훤의 거 병은 경북 내륙 일대를 초토화 할 만큼 총공세였음에도, 왕 건이 세작의 보고를 전혀 받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전황 에대해알지못했다는것은분명한주작이다. 심지어왕건은경애왕의사신에의해전황을알고난뒤에 도즉각친정에오르지않았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3회편). 왕건은세루트를통해견훤의동정을십분파악하고있었 다. 첫째, 완산주를 비롯한 백제 강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의 보고망,둘째,경북 내륙에 둔영을 구축한 고려군의 치보,셋 째, 왕도의 인후(咽喉)라 할 고울부 능문의 보고 등 세 갈래 를통한상황파악이가능했다. 한데신라구원사절이왕건에게구원을요청할때까지왕 건이 즉각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왕건은 자신이 견훤에 게 보낸 편지 속에서 평소 경애왕에 대하여 견마지로(犬馬 之勞)의 충심을 지녔다고 술회,역설하였다.한데 자신의 말 과 달리, 왕건은 경애왕이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처했을 때, 애써 묵과하였음은 물론 사태를 왜곡하 기조차하였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4회편). 왕건은 친정은커녕 묘령의 인물 공훤에게 ‘경병(頸兵) 1 (만)萬’을 구원군으로 보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구원군 은바람처럼연기처럼사라졌다. 지금껏 그 누구도 구원군 1만의 실종에 대해 의혹을 품지 않았다. 필자는 구원군을 이끈 공훤의 존재에도 의혹을 제 기한바있다. 왕건이 신라를 구원한 적은 도합 세 차례였다.①920년 10 월븮三國史記븯 권12신라본기12경명왕4년조 , ②927년 9월 븮三國史記 븯신라본기 권12 경애왕 4년 9월조, 븮三國遺事븯권2 기이2 김부대왕조., ③933년 5월 븮高麗史븯권92 열전5 庾黔弼의 경우였다. ①은 경명왕이 왕건과 수호(修好)한 지 9개월 뒤의 일이며, ②는 경애왕이 왕건과 축산을 합동 공격한 지 8개월 뒤의 일이며 븮高麗史븯권1世家1太祖10년(927) 1월조. 븮高麗史븯권57지11地理2 , ③ 은 김부가 왕건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선린(善隣)을 다짐한 지 27개월 뒤의 일이다.①의 경우는 고려 주장이 박수경,② 의 고려 주장은 공훤(公萱), ③의 고려 주장은 유금필이었 다. 한데 ①, ③은 성공했으나, 유독 ②의 경우만 실패했다. 그 결과 경애왕은 의문(비운)의 죽임을 당했다( 븮한빛신문븯 경애왕5회편). 유금필은 단 80명의 군졸만으로 신라의 위기를 구했는데, 유독 공훤은 125배나 많은 군사를 거느렸으나,신라 땅에 한 발자국도들여놓지않았다. 왕건의 방관과 거짓 선동은 군사적 자신감의 결여에 기인 했다. 왕건은 견훤과의 대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견훤의 군세는 왕건을 능가하였다. 경애왕 사후 치 러진 동수 전투에서도 왕건은 대패하였다. 백제의 질자 진 호가죽은직후에도왕건은수성만을고집했다. 또하나왕건에게있어경애왕은환영할만한존재가아니 었다. 왕건은 시종 신라 병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경애 왕과같은선이굵은인물은거북했다. 신라 내 강한 군주의 등장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왕건은 내심 신라의 부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약화를 바라고 있었 다. 신라의 힘은 왕건이 견훤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원하고 이용할수있는차원의정도에서멈춰야만했다. 군사의 진퇴에까지 사사건건 개입하며 주군처럼 행동하 는 경애왕의 등장은 껄끄럽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애초 왕 건이원하는신라왕의모델이아니었다. 이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경애왕이 견훤의 손에 거세된다 면, 차제에 왕건은 시해의 원죄를 주적 견훤에게 씌워 민심 을 일거에 자신에게 돌려 약세를 만회하고 군세를 떨칠 수 있으리란 현실적 판단이 가능했다. 이른바 ‘차도살인’의 전 술과맞아떨어지는대목이다. 실제 930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은 국왕 시해의 원죄를 견 훤에게씌워재지세력의응원을이끌었고 븮高麗史븯권2세가2太 祖213년 정월조. 븮동사강목븯 5下 김부 4년 정월 21일조. 고창 지방의 민 심이 경애왕죽음으로 인해변화했음은븮승정원일기븯 영조2년병오(172 6, 옹정4 6월 5일조), 븮四佳文集븯卷5, 安東權氏家譜序, 븮신증동국여지승 람븯권24 안동대도호부 인물 김행 편 등에 나타나고 있다., 마침내 승 리하였다. 더불어 난신적자 견훤에 의해 새로이 옹립된 신라왕은 정 통성이결여될수밖에없었다. 신라의 분열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신라 내 내분이 가속 화되면 될수록 인근 지역의 귀부나 병합은 왕건에게 더욱 손쉬워질 수 있었다.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4년9월조, 븮高麗史븯권1태조13년2월조의동해안 110여성의집단 귀부는가장대 표적예가될것이다. 군사적 희생을 통하여 경애왕을 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경 애왕을 죽여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왕건에게 더 큰 실익으 로 비쳤다. 경애왕의 죽음을 통해 민심과 실익을 한꺼번에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야흐로 왕건의 눈앞에 이른 것이었다.다만 왕건은 경애왕을 구하고자 노력했던 측면을 부각시키고선전할필요가있었다. 그런 포장의 일환에서 1만의 군사를 모우며 경애왕이 죽 기까지시간을끌었다. 1분1초가 화급한 순간에 그처럼 대규모의 군세, 1만의 군 사를 한꺼번에 모아서 출정하겠다는 것이나,무용조차 검증 되지 않은 인물을 주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구원 (救援)의 골든타임’을 놓치려고 계획하고 작심한 것이 아니 라면있을수없는일이었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6회편). 신라 내에서도 경애왕 거세를 노리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 었다. 특히 김부는 문성왕의 6세손, 헌강왕의 외손으로 친가 및 외가모두김씨로서의정통성을옹유하고있었다. 외가만 김씨인 경애왕에 비해 더욱 우월한 정통성을 지녔 다. 그럼에도 왕위계승권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김부의가슴속품은원한은깊고도절실하였다. 또 당시 형세로 보아, 김부는 정상적 방법으로는 절대 왕 위에 도전,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존재로서, 어떤 무리수를 감행할수밖에없는존재이기도하였다.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으로 이어진 박씨 왕계에서 보이 듯, 국내의 민심과 세력 상황에서 김부는 결코 정상적인 수 순을 거쳐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 봉착하였다. 이로 인한 깊은 좌절감과 복수심을 내면에 품고 있었기에 견훤의 요구, 가령 내응(경애왕 시해의 Standing Order)과 같은사안에도순응할인물로비쳐졌다고보인다. 경애왕 시해 이후 김부가 권지국사로 추대된 것에서, 최 대의 수혜자=김부 자신이라는 점도 매력적인 요소의 하나, 동인이었다. 이렇듯, 견훤 역시 차도살인의 전술을 동원, 활용했다. 견 훤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경애왕을 제거하고,이어 친견훤의 괴뢰 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다만 시해의 원 죄에서자유롭고자김부와같은내응세력을활용하였다. 왕건과 견훤은 모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도 경애왕을 제거, 실익을 챙기고 국면의 전환과 재편을 도모 했던셈이된다. 이렇게 보면 경애왕은 당시 삼국의 유력 세력 모두, 당대 의 시대 상황에서 철저히 버림당한 비운의 신라왕이었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7회편). 븮삼국유사븯는 김부식이 누락한 포석정의 내력, 포석정과 김부 일가와의 관계, 효종랑(김부의 아비)의 세력권 등, 주 요한 내용에 대해, 답사와 견문을 토대로 세세한 고증과 주 석,이설(異說)을덧붙이고있다. 이처럼, ‘경애왕의 최후’와 ‘김부 일가의 세력권(포석정, 삼화령, 해목령)’이 뚜렷이 연결, 해석된다는 것은 눈여겨 볼대목이다. 앞서 견훤은 김부를 포함하는 김씨족의 시조 알지를 기리 는 성소, ‘시림’에 진군한 바 있다. 이것 역시 하나의 일상적 이고 우연,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깊은 상징적 의미, 전략, 전술적 의도가 담긴 조치였다. 결국 견훤과 김부가 연대하 여 경애왕 제거 시나리오를 가동하였던 결과, 경애왕은 김 부 일가의 세력권에서 죽었으며, 견훤은 그 논공행상의 대 가로김부를옹립하기에이르렀다. 927년, 김부와 견훤, 둘 사이에는 경애왕 거세를 위한, 이 른바 ‘거세(참수) 시나리오’의 면밀한 설계가 짜였다. 이 경 우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시간(D-Day)과 장소, 수순일 것이 다. 결국 경애왕의 포석정 유행 역시 자발적이거나 일상적 인 것이 아니며, 군사적으로 견훤의 압박 전술에 따라 이뤄 진 불가피한 유행, 탈출이었다. 필경 경애왕은 죽음의 덫이 라 할 포석정에서 김부의 손에 의하여 제거된 셈이었다( 븮한 빛신문븯경애왕9회편). 견훤은 경애왕 죽음 직후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경애왕을 시해하지 않았음을 밝히면서도 시해의 주범이 누 구인지를 특정하지 않았고, 또 특정인이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다. 견훤은 927년 당시 서라벌에 입성했고, 보름 동안 궁궐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런 견훤이 경애왕 시해라는 무 겁고 긴요한 사안에 직면하여, 대의와 명분을 세울 행동에 해당하는 즉각적 조치, 즉 국사범에 해당하는 시해범을 체 포할의지를보이지않았다는것은주목된다. 사건현장에 가까이 있었고,휘하에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견훤의 공간적, 물리적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왕을 시해한 주범을 알지도, 잡을 수도 없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넘어애초계획한것이아닌가여겨진다. 견훤의 애매하고, 모호한 이 발언은 견훤의 심각한 방관 으로서 경애왕 시해 주범을 방조하거나 은닉, 내지는 함구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가지게 한다. 경애왕 시해의 주범은 김부일당임이지적된바있는데. 견훤이 이렇듯 경애왕 시해범을 미궁으로 처리한 것은 김 부를 경애왕 시해 주범으로 떳떳이 밝힌다면 왕의 시해범 김부를 ‘권지국사’로 옹립한 것이 되어 김부와 견훤 모두 명 분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견훤 자신이 경애왕을 시해하지 않았음을 뚜렷이 밝혀야만 하는 이중적 난제 앞에 서 왕의 시해범은 ‘종적을 알 수 없 는 난 신 ’ 으 로 표 현 되 게 되 었다. 결국 견훤이 경애왕의 시해범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장고(長考)를 통해 계산된 궁여지책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12회편).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은 왕건이 경애왕 죽음 직후 조사 (弔使)를 보내었고,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직접 거병, 친 정한 점이다. 조사(弔使) 파견븡거병과 친정의 순서는 주목 되는대목이다. 왕건의 말처럼 존주(尊主, 임금을 높임)의 진정을 지녔다 면 왕건은 거병과 친정븡조제의 순서로 이뤄져야 옳다. 왕건 은 경애왕의 죽음 직전에도, 죽음 직후에도 즉각 거병하지 않았으며,죽음이후에조차도조사를먼저파견한것일까. 왕건이보낸조사는비밀리파견한것일리없다. 흰 천을머리와몸에두르고 조기(弔旗)를 말에 꼽고경애 왕 시해를 온 천하에 공포, 견훤의 죄악상을 팔방에 퍼뜨리 며내려왔을것이틀림없다. 조사의 행로는 송악븡서라벌까지 요소요소를 거치는 만큼, 지방세력의동향에도적잖은영향을주었다고보인다. 왕건의조사파견은이에경애왕시해의책임을견훤에씌 우고 민심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려는 고도의 포석이었다. 동시에 경애왕의 죽음 직전 철저히 방관적 자세를 취했던 왕건이, 경애왕 죽음 이후에도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며 승 세를 얻을 기회를 엿보았음이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븮한 빛신문븯경애왕10회편). 또 왕건은 견훤에게 보낸 서한에서, 견훤이 ‘이리와 호랑 이’처럼 서라벌을 압박하자, 경애왕의 어가가 크게 놀랐다 고하였다. 경애왕의 어가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황옥(黃屋)은 노란 비단으로 싼 천자의 수레 덮개를 말한다. 수레의 왼쪽에 꽂 은 큰 깃발 좌독(左纛)과 더불어 이동이 전제된 수레를 함 의한다.뱚뱚 당시 경애왕이 최후의 순간, 견훤의 압박 작전에 밀려 모 처로의 이동을 도모했을 개연성을 보인다.왜냐하면 황옥이 나타나는 제 기록에서 황옥은 정지의 개념이 아니라 운동의 개념과관련하여사용되고있기때문이다. 927년 당시 경애왕이 정좌하여 질펀한 잔치를 벌인 것이 아니라, 부단한, 장거리 이동을 위해 모종의 조치를 행하고 있었다고파악할대목이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10회편). 왕건의 서한에선 또 하나 927년 신라 경애왕의 위기에 대 한왕건의방관을엿볼무언의단서가포착된다. 븮삼국사기븯에선 왕건이 927년 경애왕의 구원 요청에 대하 여 경병 1만을 파견했다고 하였다. 괴이하게도 왕건의 서한 에선그와관련한일체의언급이없다. 왕건이 평소 존주(尊主)와 견마지로의 태도를 표방한 것 과 경애왕의 죽음에 관한 전후 관계를 통하여 볼 때,왕건 자 신이 견마지로를 다했음을 드러낼 가장 중요한 전거는 1만 구원군의 파병 사실이다. 한데 왕건은 물론 견훤조차 고려 구원군1만에관한언급이전무하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한은 왕건 진영의 선전물(Propa ganda)에 다름 아니다.그러한 특성상, 없는 사실마저 날조 하는 등 악의적 표현이 다분했다고 여겨진다. 한데, 이런 기 산을 담은 서한에서 조차, ‘견훤의 경애왕비 강간’, ‘집단 강 간’항목이 없다.견훤을 공박하기에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한 사실’이 빠져 있음은 무엇 을함의하고있는것일까. ‘국왕시해’에못잖을‘왕비강간’이란충격적호재에관하 여 당시 왕건이 적시, 공박했어야 마땅했음에도 철저히 침 묵했다는 것은 단적으로 견훤이 왕비를 강간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견훤의 군사들이 비첩들을 능욕했다는 사실도븮三 國史記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조 , 왕건의 당시 서한에선 전 혀확인할수없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13회편). 경애왕을 암군으로 만들고, 허랑방탕한 군주로 낙인찍은 주인은 븮삼국사기븯의 기록에 있다. 이 책의 서술과 문면(文 面)은춘추필법의객관성을유지하고있는것일까. 븮삼국사기븯집필을 총지휘한 감수국사 김부식의 사론(史 論, 해당 기사에 대한 총평)을 보면 대략의 윤곽이 짐작된 다.이로써,븮삼국사기븯서술의기본방향을가늠할수있다. 김부식은 이른바 후삼국 시대 주요 인물들,왕건,견훤,경 애왕, 김부 가운데 견훤과 경애왕을 극도로 폄훼한 반면, 왕 건과김부에대하여는더할나위없는칭찬을퍼붓고있다. ‘이신벌군(以臣伐君, 신하로서 임금을 방벌함)’의 원죄가 있건만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의 승리자인 왕건은 천지의 덕 을 온전히 갖춘 군자로, 김부에 대하여선 천명을 알고 나라 를바쳐민생을구한지혜로운이로묘사하고있다. 김부와 마찬가지로 견훤 역시 왕건에게 귀의했건만 견훤 에 대해선 천하의 불한당, 시랑(豺狼븡승냥이와 이리)으로, 온갖 악행과 패륜(경애왕 왕비 겁간 등)을 저질러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무뢰배, 원악(元惡)으로 묘사하고 있 다. 왕건과 군사 동맹의 파트너였던 경애왕은 무능, 황음, 난 정의 대명사이자 주폭(酒暴), 나라를 망친 파락호, 망국의 군주(가령진후주)로평가하고있다. 그 결과 왕건은 승천하는 용, 견훤은 발정난 범, 경애왕은 미친개처럼묘사되어있다. 븮삼국사기븯는 경애왕과 견훤을 폄훼하기 위해, 수나라 장 수 한금호(韓擒虎)에 포획된 남조 진(陳)의 후주(後主, 중 국의 가장 용렬한 군주로 지칭되는 인물), 진 후주의 마음 을 미혹시킨 궁비 장려화(張麗華, 중국의 전설적인 요녀), 한나라 유방과 자웅을 겨룬 서초패왕 항우(項羽), 당나라 에 맞 서 반 란 을 일 으 킨 이 밀 ( 李 密 ) 등 4 명 의 문 제 적 인 물 을 거론하고있다. 븮삼국사기븯에서 전하는 대로 경애왕의 왕비가 경애왕과 짝하여 황음일락을 더한 천하의 요녀였다고 치자. 陳의 後 主븡궁비장려화의커플만큼세상에악명을떨쳤다면경애왕 왕비(그녀)의이름이사서에거론되지않을리없다. 장려화와 필적한다는 그녀(경애왕 왕비)의 이름조차 없 다는 것은 그 비교가 심히 어그러짐을 드러낸 것이자, 븮삼국 사기븯서술 자체가 부회의 선에 가까이 다가섰음을 짐작케 한다. 경애왕,견훤과 동시대인인 왕건은 격문의 형태로 낱낱이 견훤의 죄상을 공박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정작 대서특필 해야 할 견훤의 경애왕 왕비 겁간 항목이나 경애왕의 비빈 에대한집단윤간’에는침묵하고있다. 한데 븮삼국사기븯는 왕건조차 언급하지 않은 견훤의 ‘왕비 겁간’, ‘비빈에 대한 집단 윤간’을 아무 근거도 없이 기정사 실로기록하였다. 혹여 견훤이 자신이 행한 죄과 그 이상의 형량을 지고 있 는것은아닌지이제검토할순간에이르렀다. 이는 천년 이상의 오랜 세월에 걸쳐 국왕 시해, 혹은 겁간 의 의혹을 벗지 못해 온 견훤에게도, 겁간의 피해자로 운위 된 ‘경애왕 왕비’ 자신은 물론, 그녀와 직븡간접적 가족 관계 로 연결된 박씨 일문에게도 씻을 수 없는 해묵은 마음의 상 처이기때문이다( 븮한빛신문븯경애왕13회편).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14) Ⅰ.경애왕이던지는문제 뱚Ⅱ.경애왕을바라봤던따가운시선들. 뱚Ⅳ.경애왕죽음은견훤븡왕건의 합작품 박 순 교 뱚Ⅲ.경애왕죽음을전후한상황 뱚Ⅴ.경애왕의죽음과기록의행간 뱚Ⅵ.경애왕을암군으로만든기 록의허실 목 차 Ⅰ.경애왕이던지는문제 Ⅱ.경애왕을바라봤던따가운시선들. Ⅲ.경애왕죽음을전후한상황 Ⅳ.경애왕죽음은견훤븡왕건의합작품 Ⅴ.경애왕의죽음과기록의행간 Ⅵ.경애왕을암군으로만든기록의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