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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2월28일 수요일 12 (제134호) 기획 임진왜란때밀양에도달한왜장이시다미쓰나리(石田三成)는조모와부친의상을당하자전쟁을피해도망가 지아니하고죽음을각오하고시묘살이를 하는모헌박양춘선생의모습을보고그의효심에감복하여다른왜병도이사람을해하지말라는뜻으로“하 늘이내린효행(出天之孝)”이라는글을적 어시묘를할수있도록하였다. 처마끝의낙수를지켜보라.방울방울떨어져내리는데어긋남이없을것이고효자집안에서효자가난다는 말이있듯이자식은부모의효행을본받는 다.즉선생의가문을보면그효행의깊이를가늠해볼수있어소개해본다. 선생의후손규석현종(모헌공종 중 회장)이 묘아래에 거주하며 묘소를돌보고있다. 선생은 밀성대군의 후예이다. 중조(中祖) 태사 공(太師公) 휘 언부(彦孚)는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사(太 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 하였으며밀성부원군으로피봉되었다.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는 효신(孝臣) 차는 의신(義臣)이다. 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 신(孝義兩臣) 또는 고려주석(高麗柱石)이라 부 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필 넉자를 하사 했다. 효신(孝臣)은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이 되 었고 평장사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천자 가 예로서 대우하여 치사하였고 본국에 돌아와 졸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라 사시하고 인종 묘에 배향하였다. 의신은 공부상서로서 종방인 양신(良臣:彦祥의 아들), 직신(直臣:彦仁의 아 들)과 더 불어 세상에서 삼언사신(三彦四臣) 이 라알려져있다. 공필(公弼)은 효신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 여 대장군 도검사 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공은 문무에 재주가 겸비하여 고려 예종(1107년) 2년 에 윤관과 같이 여진을 쳐서 평정했다. 뒤에 진국 공신으로 추존되었고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사 시하였다. 육경(育慶)은 공필의 아들인데 1130년 인종8 년에 대장군과 병부상서를 지냈다. 또 1135년에 김부식과 함께 적(賊) 조광 등을 쳐서 평정하였 다. 또, 글을 올려 양현고(養賢庫)를 세워서 많 은 선비를 기르게 하고 또한 모든 고을에 널리 학사를 설립하였으며 국사를 보살펴 수정하였 다. 대화(大和)는 육경의 아들인데 대호군 이부상 서였으며 수문학 대제학으로 문무가 겸전하였다. 간(幹)은 대화의 아들인데 문과급제로서 병부참 정(兵部 핫政)이었고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배 위는 추화군부인(推火郡夫人) 밀성손씨(密城孫 氏)인데 여지승람에 기록 되어 있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영균(永均), 세균(世均) 형제인데 세균 은선생의파조가된다. 행산공(杏山公) 세균(世均)은 양효공(良孝 公) 간(幹)의 차차(次子)로서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이며 전문형(典文衡,정2품)과 중국 元나 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귀국하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밀성부원군 ( 密 城 府 院 君 ) 에 봉 해 진 후 사 후 시 호 ( 諡 號 ) 는 충정(忠靖)이고, 아들 도은공(挑隱公, 휘 文彬) 과 소감공(少監公, 휘 文翊) 형제는 포은(정몽 주), 목은(이색)등의 문인들과 교류하는 등 높 은 학덕으로 목은 선생의 시(詩)에도 전해지듯 당대의 거유(巨儒)이다.특히 공민왕은 광효(光 孝) 두 글자를 하사함으로서 효(孝)의 가문임 을 엿 볼 수 있 다 . 행 산 공 은 선 생 의 9 대 조 부 가 된 다. 선생의 고조 휘 형달(亨達)은 진사(進仕)로 호를 사미(四美)라 하였고 한훤당(寒暄堂) 김 굉필(金宏弼)과 일두(一亮) 정여창(鄭汝昌) 등 여러 선비들과 점필재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 었다. 인의(引儀, 통례원에 있던 종6품직, 의식 에 관한 일을 담당)의 벼슬에 천거되고, 또 경전 에 밝아 봉교(奉敎, 예문관의 정7품)에 제수되 었다. 증조부 언계(彦桂)는 진사로 정암 조광조 와 절친했으며, 곤양제독(昆陽提督)에 천거되 었고, 조부 휘 대성(大成)은 호가 안국암(安國 巖)인데 회재 이언적, 남명 조식 등 여러 선생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었으며, 아버지 휘 항(恒)의 호는 성재(惺齋)로 효행으로 호조참의에 제수 되었으며, 어머니는 일직손씨(一直孫氏)인데 경당 효조(敬堂 孝祖)의 손자 운주(雲澍)의 따 님이다. 註 -손효조 :조선 전기의 유학자.김종직(金宗 直)의 문인(門人)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김용석(金用石) 등과 함께 주희(朱熹)의 고사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소학(小學)을 강 론하였다. 선생의 휘(諱)는 양춘(陽春)이요 자(字)는 경 화(景華)이며 호(號)는 모헌(慕軒)으로 대대로 충효 가문에서 명종 16년 신유(1561)10월 16일에 경남밀양의사포리본제(本第)에서태어났다. 천품(天稟)이 아름답고 성실하여 효성이 지극 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생원 김천수(金 天授)에게 수학하여 학업에 정성을 다하고 일상 의 기거동작(起居動作)이 단정하므로 김선생이 매우 사랑하여 다른 학동들에게도 그 행동을 본 받게하였다. 22세(壬午)때 6월에 부친상을 당하자 30리 밖 대곡리에 장사(葬事)를 치루고는 묘역에 여막 (廬幕)을 짓고 조석으로 상식을 들이며 묘소를 떠나지 않았고 낮에는 격일로 30여리를 걸어 집 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어머니를 봉양하니 한서풍 우(寒暑風雨)에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하루는 집으로 오는 길에 큰 비가 내려 중도(中途)에 있 는 광 탄 진 (廣 棠津 )의 물 이 불 어 건 널 수 가 없 었 으니 선생께서 망연자실하여 슬피 울면서 나룻가 를 방 황 하 고 있 을 때 참 으 로 영 묘 (靈 妙 )한 일 이 발생하였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갑자기 좌우 로 갈라지면서 길이 트이어 선생은 옷도 적시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가 있었다.이때 이런 이변을 목격한 부근의 사람들은 감탄하며 말하기를 뷺상 주(喪主)의 지극한 효성에 천지신명이 감응한 것 이다.뷻라고하였다. 32세 때인 선조25년 壬辰(1592) 6월에 승중(承 重, 아버지를 여읜 맏아들이 할아버지나 할머니 가 돌아가셔서 치르게 된 초상)상을 7월에는 모 부인(母夫人)상을 연이어 당하였는데 4월에 왜 란이 일어나 마을에 인적이 끊어졌으니 장례를 치룰 수가 없어 겨우 초빈을 끝내고 빈소에 엎드 려 호곡(號哭)을 그치지 않았다. 이때 북상하던 왜적(倭賊)들이 사포리를 지나다가 이 정황을 보 고 길을 멈추었는데 선생의 이상한 형상과 수척 한 모습을 보고 놀라 서로 돌아보며 경계하였다. 천우신조(天佑神助)인가 뜻밖에 왜장 석전삼성 (石田三成)이 漢文을 이해(理解)하였으므로 선 생과 필담(筆談)을 주고받다가 왜장이 크게 감동 하여 말하기를 뷺이는 참으로 지극한 효성이다.뒤 를 따르는 자는 해치지 말라뷻하고 마을 입구에 표 식(標識)을 세우고 약물(藥物)도 남겨두고 물러 갔다. 이런와중에서도선생은대가(大駕)가반천(潘 遷)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난중수려미 능 호종(亂中守廬 未能扈從, 난리중에 여막을 지 키니 능히 임금을 따르지 못하여)’이란 시를 지어 우국애군(憂國愛君)의 충정을 나타내었으니 선 생은 참으로 충효의 사상을 겸전(兼全)한 올바른 선비였다.7년의 전란으로 두 분의 장사를 치루지 못하다가 선조31년 무술(1598)에 비로소 사포리 북산에 안장(安葬)하고 3년 상을 마치니 선생은 장장 10년 동안 마의(麻衣)와 상립(喪笠)을 벗지 않았다. 39세 되던 해인 선조32년 乙亥(1599)에 고조부 학사공이 창건한 사미정(四美亭)의 수호를 위해 풍각현 현북면 남산동( 銀角縣縣北面南山洞- 현 재의 청도군 각북면 남산동)으로 이주하였다. 41 세(辛丑)때는 당대의 학자인 손오한(孫 졀漢), 김박연(金博淵), 안오휴자(安五休子)등과 더불 어 향안(鄕案)에 참여하여 좌수(座首)를 엮임 하 는 등 임란(壬亂)후 쇠퇴한 향풍(鄕風)순화와 질 서회복에 20여 년간 진력하였고 64세 때인 仁祖2 년 甲子(1623) 5월에는 밀양 향안중수문(鄕案重 修文)을교정하였다. 만년에는 남산리에 은거하면서 종제(從弟) 국 담(菊潭) 수춘(壽春)과 더불어 집을 나란히 하 고 때로는 같이 밭 갈며 때로는 마주앉아 경서 (經書)를 강론하며 여생을 보내니 당세의 석학, 현관(顯官)들이 선생의 군자다운 풍도(風度)와 우애(友愛)를 깊이 흠모하고 칭송하는 시를 지 었다. 인조9년 辛未(1631) 8월에 침질(寢疾)에 드시 어 동년 10월 17일에 고종(考終)하시니 향년 71 세이다. 달을 넘어 청도의 보광산 子坐의 언덕 에 장사 지냈다. 士林들이 선생의 효행과 도학 으로써 道에 글을 올려 조정(朝廷)에 진달하자 이조참의(史曹 핫議)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우위자(尤爲子) 곽세건(郭世健)은 묘표(墓表) 를 지었고 자손들은 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 하여 유당(幽堂)아래에 서당을 세우고 보광암 (普光奄)이라 편액 하였으며 선생께서 임란 때 빈소(殯所)를 지키고 사시던 사포리에는 고을 에서 정려각(旌閭閣)을 세웠고 정조조(正租 朝)때는 선생의 효행이 삼강록(三綱錄)에 실리 었다. 정려각이 퇴락하자 1912년(壬子)에 향도(鄕 道 ) 의 士 林 들 이 여 표 유 허 비 ( 閭 表 遺 墟 碑 ) 를 세 웠는데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는 銘에 이르 기를 뷺孝道는 百行의 根源이요, 誠은 萬事의 터 전이다. 선생의 초인적인 효행에 하늘이 감동하 여 강물을 열었고 왜적이 감동하여 마을에 정표 (旌表)를 높이 세웠다. 만고(萬古)에 보기 드문 선생의 효성을 백세의 귀감으로 삼아 孝의 사상 이 날로 쇠퇴해지는 말세(末世)를 경계한다.뷻고 하였다. 보강재는 경북 청도군 각남면 흑석리 보광산 아래에 있다. 즉 선생의 묘 아래 마을로 후손들의 집성촌이기도하다. 재사(齋舍)에 들어서면 선생의 자작시 가 빗돌 에새겨져후손들을깨우고있으니다음과같다. 【난중수려미능호종(亂中守廬 未能扈從, 난리 중에 여막을 지키니 능히 임금을 따르지 못하여) / 시여미진효(侍廬未盡孝, 여막을 모셔도 효를 다하지 못하고)/ 우국성난충(憂國誠難忠, 정성 으로 나라를 걱정하여도 충성은 어렵고)/고아부 이앙(顧我俯而仰, 하늘을 우러러 나를 돌아보니 내몸이)/ 일신괴작중(一身愧作中, 부끄러운 가 운데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 성한 오세창 선생이 쓴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비 록 구중궁궐(九重宮闕)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후손들의 깊은 정성을 엿볼 수 있어 1951년 진성 인이세호님의보강재기를인용해본다. [보강재기] 청도(靑道)의 서쪽 흑석(黑石)마을에 대나무 와 잣나무가 우거지고 연기와 노을이 땅에 가득 한데 곧 모헌(慕軒)선생 朴公의 재실이 있고 자 손들이 그 아래에 살고 있다. 公의 천성이 효성 이 지극하였으나 겨우 20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30리 밖에 장사를 치루니 중간에 뱃길이 있었다. 낮에는 묘소 옆에 있고 밤에는 어머니를 봉양하 는데 춥고 더운 것을 가리지 않았다. 하루는 비 로 여울물이 넘쳐흘러 날개가 없으면 건널 수가 없었다. 公이 물가를 오르내리며 슬피 울부짖으 니 살아남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강물 이 양쪽으로 갈라져 평상시와 같이 건너게 되었 으니 신명(神明)이 도운 것으로 이를 어찌 얼음 속의 잉어나 눈 속의 죽순(竹筍)과 다르다 하겠 는가? 훗날 임진왜란이 닥쳐 사람은 다 새와 짐 승처럼 도망가고 숨었으나 公은 조모와 모친의 상이 겹쳐 울면서 상례를 지키고 관(棺)곁을 떠 나지 않으니 왜인(倭人)들이 역시 의롭게 여겨 감동하여 마침내 마을에 정표(旌表)를 세웠다. 아아! 公의 가문에 찬란한 유래가 있으니 문익공 (文益公)과 문절공(文節公) 두 어른이 그 바탕 을 이루었고 안국암(安國巖), 성재(惺齋) 양 대 가 그 유업을 이어 받아 뿌리를 키웠으니 그 열 매가 널리 빛난 것이 당연하리라. 안으로는 문벌 과 대대의 계통이 이와 같이 아름답고 밖으로 점 필재( 탕畢齋), 회재(晦齋), 남명(南冥)등 여러 어진 이와 더불어 혹은 스승으로 섬기어 배우기 도 하고 혹은 따라 놀며 벗하였다. 글과 예절에 익숙하여 충성과 효도를 다하였으며 상자속의 글은 빛나고 빛나 참으로 증명할 만하니 아름답 지 않은가? 옛날의 재실은 창건한 내력을 옛 사 람이 적은 것이 없고 글자도 분명치 않을뿐더러 또 궁벽한 오지에 있어 오랜 세월에 허물어졌다. 지난 계축년(癸丑年) 봄에 마을 옆으로 옮겨 세 우니 이제 소나무와 추나무가 무성하고 꽃과 나 무는 서로 어우러져 경치가 다시 볼 만하다. 산 과 강의 고운 빛깔은 더한데 봄 이슬과 가을 서 리에 불안하고 두려워하여 아침에 거문고 타고 저녁에 글 읽어 힘쓰고 힘쓰게 되었으니 영령께 서도 오르내림이 적당하고 지키며 보호하는 방 편도 편리하게 되었다. 재실(齋室)은 대개 네 칸 인데 가운데가 마루이고 동서는 방이며 밖에는 대문이 있어 정면의 현판을 보강재(普崗齋)라 하 였다.-이하생략- 최근 들어 우리사회는 끔찍할 정도의 많은 사 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존속간의 사건이 늘 어나고 부모가 죽어도 당일 탈상하는 예가 많다. 부 모 는 자 식 을 낳 는 데 열 달 을 배 아 파 했 고 행 여 불면 날아갈까 애를 태우며 자식 봉양에 심혈을 쏟아 붓는다. 그럼에도 부모상에 있어 자식들의 처세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얼마 전 친구 부모의 부고를 받고 문상(問喪)을 하는데 상주가 조문하려는 문상객을 보고 웃으며 옛 친구를 만 나듯 돌아다니고 있어 고인에 대한 예(禮)만 취 하고 돌아오며 왜 그리도 좋을까 의아해 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가운데 차라리 부의금만 보내고 가지 말걸 하는 생각도 해 보았 다. "효도는 백행의 근본(根本)이다."라고 했고 " 선비의 온갖 행위 중에 효도가 근본이고 삼천가 지 죄목 중에 불효가 가장 크다."고 하였다. 그러 므로 효도는 우리에 게 만 행 ( 萬 行 )의 으 뜸으로 받아 드려져 야하고 또한 실천해 야 하 지 않 을 까 하 는 까닭에 왜장도 감동시킨 모헌 선생 의 효행은 참으로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글·사진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 2@hanmail.net) 인용 : 모헌가집 (慕軒家集) 하늘에서내린효자모헌 박양춘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모헌선생의선원세계(璿源世系) 모헌생의묘소아래에위치한집성촌으로보강재가있는흑석리전경. 모헌선생여포비각(경남문화재자료195호)-경남밀양시부북면후사포리. 보강재-경북청도군각남면흑석리 . 선생의생애(生涯) 모헌선생묘소(흑석리후(後)보광산子坐. 선생의재사(齋舍)보강재(普崗齋) 보강재전경 보강재편액(독립운동가오세창선생의글씨). 맺음말 보강재중수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