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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팔은 충북 제천군 한수면 서운 출신이다. 그는 1차?2차 의병전쟁에서 모두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1907년 순절한 인물이다. 1차 의병전쟁에서는 여주 의병장 심상희(沈相禧)의 후군장에 임명되어 여주 의진의 전세를 크게 뒷받침해 주었다. 당시 여주 의진은 경기도의 각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남한산성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하는 연합전선이 구성되어 심상희가 그 여주대장이 되었다. 그것은 심상희의 여주 의병이 다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따로 지휘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적의 이간책으로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퇴한 뒤에 여주 의진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심상희는 다른 의병진과 화합, 협력하지 못하였던 듯하다. 1896년 2월(음) 장호원(長湖院)의 병참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원주를 거쳐 청풍으로 패퇴하였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여주진이 해산되자 원용팔은 일시 의암(毅菴) 진의 중군장(中軍將)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가 의암 진에 머문 것은 불과 보름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 동안 거의 우기에 있었으며, 전투도 없었다. 그리고 의암의 의진은 처음부터 긴밀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출신 배경이 다른 원용팔이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후 을사조약이 있기 2개월 전인 1905년 9월 중순 경(음력 7월경)에 초기 의병 때 같이 의진에서 활약하던 회당 박정수(悔堂 朴貞洙) 등과 함께 재거사를 계획하고, 각처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집결시켰다. 그는 의거를 결정함과 함께 호남의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등 1차 의병전쟁 때의 각지 의병대장들에게도 글을 보내어 함께 일어날 것을 권고하였으며, 또 의암 유인석에게도 글을 올려 거의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현재의 불행한 형편으로 말한다면, 일본이 말로는 고문이라는 명색을 갖고 있지만, 나라의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니 소위 10부 대신이라는 것을 벌써 일본 정부로 화하여 버렸습니다. 들판을 태우는 큰 불길이 8도로 퍼져서 시골에 약간 남은 옛 풍속도 몇 날 안에 다 없어지게 되고, 소위 재판이니 세금을 받느니 하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새로 정한 약조(約條)가 1백60조나 된다고 하니, 무슨 흉모(兇謀)가 이렇게까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을 차례차례 실시하여 그들의 욕심을 채우고야 말게 되겠습니다. 이 시기의 형편이야말로 칼자루를 남에게 맡겨서 나를 죽이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산림 천택(山林川澤)을 점거하는 일이나, 호구를 등록하고 군대를 개혁하는 일같은 것을 제 마음대로 하고, 일찍이 우리를 나라로 보는 일이 없으니, 아 사람으로서야 이 모양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위의 글은 회당(悔堂) 박정수(朴貞洙)가 원용팔을 대신하여 쓴 글인 것으로 보인다. 또 그들은 격고문(檄告文) 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역적과 오랑캐를 토벌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산림 천택을 다 점령하여 버리며, 재정과 토지를 그만 제 물건으로 만들었다. 왕실이 불탄 것 같으니 새 둥우리가 벌써 엎어졌는데 알이 온전할 리 없고, 흙집이 이미 기울어졌으니, 가죽이 남지 않았는데 털이 어디 붙어 있을 것이랴. 시랑(豺狼)이 우리 생민을 못 살게 구니 미운 것이 이 이상 없으며, 견양(犬洋)이 우리 예속(禮俗)을 더럽히니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듣고만 있을 것이랴. 사람마다 원·안(袁安)의 탄식이요, 채·애(蔡哀)의 곡성이로다. 심지어는 간악한 백성들을 깊이 맺고 악한 무리들을 널리 벌여 놓으니, 소위 일진회(一進會)라는 것이 어떤 난적(亂賊)의 무리인지, 만일 저들 하는 대로 버려둔다면 반드시 나라를 없이하고서야 말 것이다. 또 고문(顧問)이라는 관직을 만들어서 지방관의 직책을 빼앗고, 8도에 가득차게 그 무리들의 앞잡이들을 배치하여 온 나라 안을 그물질하고, 우리 백성들에게 올가미를 씌운다. 요(堯)·순(舜)·우(禹)·탕(湯) 제왕(帝王)의 글은 끝내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끊어지고, 공(孔)·맹(孟)·정(程)·주(朱) 성현의 학문은 멸망의 참변을 당하고 말 것이니 이를 어찌하리오. 다시는 예전 조선의 전장법도(典章法度)가 아니오, 완전히 소일본(小日本)의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뱀과 돼지가 겹쳐 다가드니 화가 우리나라에서 시작하는데, 물과 불이 깊어만 가니 운수를 어찌 하리오. 의(義)를 바로하면 이(利)가 그 안에 있는 것이오, 오랑캐로 변하면 사는 것이 죽음만 못한 것이다. 사람이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오는 것이요, 난이 극한에 가면 다스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문을 열고 도적을 들인 무리가 아니면 그 뉘라서 저들의 고기를 먹으며 가죽을 깔고 잘 생각이 없을 것인가··· 아 인재를 다른 데서 빌어 오지 않아도 될 것이니, 스스로 너무 겸손하지 말고 사람마다 각각 당연한 일로 보아서 맹세코 이 환란을 건지기로 하자. 이렇게 충정을 다하여 포고한 후에도, 만일 의리를 모르고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역적의 당파를 먼저 베는 벌을 받을 것이요, 털끝만큼도 용서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위로는 조정 신사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깊이 명심하여 후회가 없도록 할지어다." 이상에서 본 바 원용팔의 의거 취지는 많은 친지?지사 및 민중들의 공명(共鳴)을 얻었으며, 격고문이 각 고을에 돌려짐과 함께 제천(堤川)·청풍(靑風)·횡성(橫城)·홍천(洪川) 일대에 걸친 충청북도와 강원도 지역이 모두 호응하게 되었으며, 원주(原州)의 동쪽 주천(酒泉) 지방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모여드는 장병들이 1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용팔 등은 직접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장병들을 모아 편성, 훈련하면서 좀 더 유능하고 신망 있는 인물을 맞이하여 주장(主將)으로 받들 것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형세가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원주 진위대에 출동을 명령하였으며, 원주 진위대의 김귀현(金貴鉉)은 의병대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않는 것을 기화(奇貨)로 삼아서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을 시켜 의병진의 와해공작(瓦解工作)을 하고, 일부의 장병들이 흩어지는 기회를 이용하여 습격, 원용팔을 추적하여 횡성에서 체포하게 되니, 의병진은 애석하게도 해산되고 말았다. 체포된 다음에도 원용팔은 종전의 기개와 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심문하는 왜장이나 관원들을 꾸고 타일렀으며, 일인들이 주는 음식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인 사령관 장곡천(長谷川)의 심문을 받았는데, 장곡천이,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고만 하면 이 자리에서 놓아주겠다."고 하니, 그는 태연자약하게도 "동대문 밖에만 나가면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대답하였으며, 또,"누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겠는가?"고 물으니, "호응하는 사람이 없으면 집안 사람들과 같이 하고, 집안 사람들도 호응하지 않으면 나 혼자서 하겠다."고 대답하여 대한 남아의 불굴의 의기를 보여 주었으며, 이듬해 1907년 3월에 옥중에서 병사 순국하고 말았다. 이때 원용팔?박정수 등이 거의하다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정운경(鄭雲慶)은 이규석(李奎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함께 단양으로 가 급히 군사를 모집하여 며칠 안에 삼사백 명을 소집할 수 있었으나 역시 체포되어 군부(軍部)로 압송 고 말았다. 이처럼 원용팔의 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감명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