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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문은 미주 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 1919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지방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노백린(盧伯麟)이 설립한 월로우스의 한인비행사 양성소 서기로도 활약하였다. 1919년 1월 16일 미국 오하이오주 애크론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애크론지방회를 발기하고 서기로 선임되었다. 1920년 2월 캘리포니아주 월로우스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김종림(金鍾林) 등이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에 참여하여 서기로 활동하였다. 한인 최초의 비행학교인 비행사양성소는 1920년 5월 비행기 2대를 사들여 미국인 기술자 1명, 한인 비행사 6인으로 교수진을 구성하였으며, 재학생은 19명이었다. 학교 유지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은 교포들의 특별의연금과 봉사로 유지되었으나, 설립 후 7개월 만에 재정 악화로 폐교되었다.1923년 2월 남캘리포니아주 태프트지방회를 설립하고 서기 겸 재무로 활동하다가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이주하여 1945년까지 시카고지방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재무겸 실업, 1931년 실업 겸 구제, 1931년 부회장, 1936년 대표원, 1937년 집행위원장, 1941년 대표원, 1942년 재무, 1943~44년 집행위원장, 1945년 대표원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1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는 한편, 1939년 10월 중국피난민후원회가설립되자, 변준호(卞俊鎬)의 부탁을 받고 시카고에서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중국피난민후원회는 뉴욕·시카고·로스엔젤레스 등지에서 조직되어 일화배척, 군수품 일본수출 반대, 선전책자 발행, 강연회, 모금 및 시위 등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1941년 2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1943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편되었다. 1944년 9월 조선민족혁명당 북미총지부 통상회가 개최되자, 이 통상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4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