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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극히 총명하고 남달리 의분심이 강하였다. 고종 一八七四년 갑술(甲戌)에 무과에 올라 통정대부와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장(通政大夫 龍讓衛副護軍兼五衛將)을 지냈으며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지우(志友)와 함께 충의를 논하고 국사를 근심하다가 순종 一九○六년 병오(丙午)에 록천 고광순(鹿川 高光洵) 인봉 고제량(麟峰 高濟亮) 운곡 정용식(雲谷 鄭瑢植) 등과 창의(倡義)를 맹서하고 장정들을 모으고 병기를 조달하니 위세(威勢)가 크게 올라 一九○七년 정미(丁未) 五월에 능주의 적을, 八월엔 동복리 적을 쳐붓고 구례 연곡사로 행군하니 지세가 영호남 인후(咽喉)로서 용병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화개동의 적을 겨누어 포살노획(砲殺鹵獲) 하였던바 적이 원근의 병을 모아 대공세를 취하며 녹천과 인봉이 함께 전사하고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아군은 무너지고 체포되어 공은 광주로 압송 형국이 혹열함에 분을 참지 못하고 적을 매도하여 너희는 만세토록 우리와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이니라 하고 외쳤으며 드디어 대구 형무소에서 五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 앙앙(怏怏) 怏:( 맘에 차지 않을 앙) 히 세월을 보내던 중 一九一八년 무오(戊午) 十二월 二十일에 고종께서 승하하시니 애통함이 극에 달하여 마침내 병을 얻고 一九一九년 을미(乙未) 三월 十七일에 졸(卒)하니 북면 원리 후 호암하(北面院里後壺巖下)에 숙모인 밀양박씨(淑夫人 密陽朴氏)와 함께 모셨으며 五 자녀를 두어 춘조 상조 헌조 관조(春朝 尙朝 憲朝 寬朝)요 녀는 옥천 조기호(玉川 趙基昊)에게 가(嫁)하고 삼방손(三房孫) 병의(炳儀)는 조고(祖考)의 뜻을 이어 항일투쟁으로 상해 임시 정부군 군자금을 모으다가 왜경에게 잡혀 대구 고등법원에서 一년 六월의 형을 받았나니 이는 그 조부에 손자로서 그 위대한 가풍이 어찌 열일(烈日)같이 아니하랴. 슬프도다. 남파공의 옥고는 五년에 걸쳐 몸은 비록 고통이었으나 그 기백은 더욱 굳세었나니 그 의기 그 성충(誠忠)은 영세에 길이 빛나리로다. 오호라, 공을 위하여 일찍이 정포(旌褒)를 못하였으나 포불포(褒不褒)가 어찌 공의 안중에 있을까보냐. 그러나 지난 一九七七년 정사(丁巳)년에 우리 정부에서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여 구천지하(九泉地下)에 계신 충혼을 위로하였으며 사림(士林)들이 유적비를 세우기로 합의하고 비명(碑銘)을 나에게 간청하기에 내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무딘 붓을 들었는바 드높은 그 얼에는 하늘 땅도 감동되고 쓰라린 그 옥고는 독립정신 일깨웠네. 광복된 나라와 겨레 님의 유방(遺芳) 기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