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18년1월31일 수요일 12 (제133호) 기획 조선시대에일어난네차례의사화는곧1498(연산군4)년의무오사화(戊午士禍),1504(연산군10)년의갑자사화(甲 子士禍),1519(중종14)년의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명종1)년의을사사화(乙巳士禍)를말한다.이중무오사화와갑자사화는성종때기용된신진사류(新進士類 )즉김종직의문하생들이 주요 화(禍)를 입은 사 건이다.성종은원래학문을좋아해유교문화가크게성숙되었으며,길재(吉再)의학통을이어받은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명성이높았던김종직과그의문하 생을중용하면서 당시중앙정계를장악하고있었던훈구관료들을견제하면서중앙에진출한신진사류는기성세 력인훈구파에게위협적인존재가되어이들은 서로를견제하며앙숙이되어간것이다.연산군의방탕한생활과폭정은신진사류가대거포진한사간원의지적 이담겨진상소가이어졌고,이를틈타유자광을 중심으로한훈구파는김일손(金馹孫)이성종실록을편찬할때스승김종직이쓴조의제문(弔義帝文)을사초(史草 )에실은것이이극돈을통하여연산군에게알려 지면서무오사화로이어졌고,연산군이생모인윤씨폐위및사사사건당시이를주장한사람이거나방관한사람 들을모조리찾아내어죄를묻게되는갑자사화 로이어졌다.오졸재박한주선생은김종직(金宗直)의문인으로1485년문과별시(文科別試)에급제하여1497년(연 산군3)사간원헌납이되어연산군의실덕(失德) 을직간(直諫)하였고또임사홍(任士弘)등의간악함을탄핵하는차자(箚子)를올리는등직간을서슴지않으면서 무오(戊午)·갑자사화(甲子士禍)에연루되어화를 입었다.이후1506년(중종1)중종반정으로신원되었고,1517년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등의계(啓)에의하여도 승지겸예문관직제학이추증되었다. 선생의 본관은 밀성(密城)으로 휘는 한주(漢柱), 자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迂拙齋)다. 밀성대군 의 14世 행산공(杏山公)의 현손이다.행산공은 벼슬 이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이며 전문형(典文衡)과 중국元나라에서한림학사(翰林學士)를지내셨다. 원 나 라 구 양 현 은 선 생 을 떠 나 보 내 며 지 은 시 (詩) “송고려박학사”는지금도전해지고있다.귀국하여 벼슬이평장사(平章事)에이르고,밀성부원군(密城 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이라 별 세 후 에 받 아 당 대 의 거 유 (巨 儒)임 을 알 수 있 다 . 행산공의 아들 도은공(挑隱公, 휘 文彬)과 소감공 (少監公, 휘 文翊) 형제가 포은(정몽주), 목은(이 색)등의 문인들과 교류하였으며 목은 先生의 시중 (市中)에도 있듯이 부자(父子) 세분이 학문이 깊 었기에 가전삼학사(家傳三學士)라 칭하였던 구절 이 있다. 특히 고려가 망하자 삼부자 모두가 함께 이조개국에참여하지않는절의정신을보였다. 도은공(휘文彬)이선생의증조부가된다.조부휘 신보(臣輔)는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아버지 휘 돈 인(敦仁)은훈도(訓導)로서후학양성에매진했다. 선생은 1459년(己 卯) 경북 청도군 풍각 면 차산리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 부터 총명하고 영오 (潁悟)하여 육·칠세 때 능히 글을 부치고, 예쁜 열 살 나이에 고 을의 생원 고극경에 게 배움을 받았는데 언어와 기상을 기이 하게 여겨 반드시 의 관을 정제하여 가르 치 시 기 를 기 다 리 니 다른 동자보다 다르 기 때 문 이 라 . 좀 자 라 서 강개하여 큰 뜻을 품으니 써 옛 성현을 스스로 기약하니 한훤 당 선생과 탁영 선생 으로 함께 점필재 선 생에게 배우러 나아가 니 돈독한 신념으로 힘써 행하고 널리 배워 기억하니 날로 천만 언(言) 을 외우고 밤낮을 이으니 학문이 더욱 나아가고 식 견이 더욱 높으니 문장과 기절이 멀리 흘러내리니 원방의 선비 풍문에 듣고 일어나는 자 또한 많으니 그때사람이두남(斗南)일인이라하였다. 1483년(성종 14)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였다. 전생서직장(典牲 署直長)에제수된뒤한성부참군으로옮겼다.1488년8 월군자감주부에오르고9월에사헌부감찰,12월에영 안도(현 함경도) 평사, 1490년 12월 봉상시 주부, 1491 년2월사간원정언이되었다.성종22년(1491년)5월7 일선생은경연에서영안남도(현함경남도)평사때의 일을 성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어 선생이 예(禮)와 도(道)를중시했음을엿볼수있어언급해본다. 【뷺신이 일찍이 영안남도 평사(永安南道評事)가 되 어 그 주민들의 풍속을 보았는데, 오히려 야인(野人) 의풍속이있었습니다.부모(父母)나형제(兄弟)가죽 으면시체를나무구유에담아전야(田野)에버려두고 돌을모아다눌러놓으며,심한자는말똥속에묻기도 하는데,조금도괴이하게여기지않습니다.또초상(初 喪)과제사를지내지않으니,이것이비록신의임무는 아니라 하더라도 통분(痛憤)하지 않을 수 없어 방(榜) 을 걸어 깨달아 알게 하고,부자(父子)의 은혜와 장사 지내고 제사지내는 법으로 깨우쳤습니다. 그 후에 간 혹 장례(葬禮)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는 자가 있기는 하였지만,옛날의 풍습은 혁파(革罷)하지 못하였습니 다. 성명(聖明)한 조정에 어찌 이와 같은 풍습이 있을 수있겠습니까?뷻하니,임금이말하기를,뷺지난번에장 례를치른저녁에풍악을연주하여시신(屍身)을즐겁 게 하는 풍속이 있어서 이미 그것을 금지하도록 하였 는데,그것은혁파(革罷)되었는가?뷻박한주가또아뢰 기를, 뷺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북쪽 사람들은 남녀(男 女) 간에 분별이 없어 집에 큰 온돌방을 만들어 여행하 는 사람에게 숙박을 허락하되 칸막이가 없으므로, 이 때문에 그 주인의 처나 딸과 간통하는 자가 매우 많으 니,청컨대엄격히금지하도록하소서.뷻】 선생은일찍경연에들면임금이말씀하시기를속 된 말로 토하나 지극한 바른 말이라. 이는 대개 선생 의성의에임금이감동함이라속된말로바른말이많 으나다곧음이다.6월에성균관전적으로옮기고7월 에 어버이 봉양을 위해 청원하니 창녕현감을 제수하 시어정사에임하여다법에맞추어정밀하고엄숙하 고용서함에도리에맞추어힘쓰니백성의그잃은바 를내몸같이하여반드시구제한후에진실로백성에 이로움이 있었나하고 비록 노고를 싫어하지 아니하 고 곳곳을 살피는 바 심산궁곡이라도 가지 아니하는 바없으니오직원한을씻고만물에은택입히는마음 이라.혹필마로따르는무리물리치고거리를암행하 여민정을찾으니사람이알지못하더라.특히선생은 더욱 부지런히 학교를 일으키고 교화를 밝혀 읍중에 총명한 자제를 가려 함께 강론하니 성현의 수신(修 身)하고 사람 다스리는 도(道)라. 근본을 돈독히 하 고풍속을선하게하는일에춘추로양로연을행하고 몸소 수고함을 인하여 병든 자를 묻고 초상 장사 장가 가고 시집가는데 도와주는 일에 때를 잃지 아니하니 풍속이 돈화(敦化)하여 효도하고 청렴하고 부끄럼 아는 풍속이 집집마다 있어 성종 24년(1493년) 12월 2 4일 관찰사가 염근(廉謹)하게 봉공(奉公)한다고 계 문(啓聞)하여한자급을더하고포상이내려졌다. 1496년(연산2년) 7월에 임기만료(창녕현감)로 종부시 주부로 입배하고, 8월에 군자감 판관으로 승수되고, 12월에 사직령 겸 춘추관 기주관 지제 교,1497년 3월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같은 달 9일 경연에서 연산의 방탕한 생활을 다음과 같이 지적 했다. “전번 홍문관(弘文館)에서 경연(經筵)에 납 시기를청할때,안질이있다고답하셨습니다.진연 (進宴,궁중의 잔치)에는 안질로 사양하지 않으시 고, 경연에만 납시지 않습니까? 성종께서 문소전 (文昭殿,조선 태조 및 그의 정비 신의 왕후의 위패 를 모신 사당)에 친향(親享)하시던 날, 정승 정인 지(鄭麟趾)가 아뢰기를, ‘세종께서는 친히 사열하 신 후에 날이 늦더라도 또한 경연에 납시었으니, 지금 제사를 끝낸 후 역시 진강(進講)을 하셔야겠 습니다.’ 하니, 성종께서 곧 좇았습니다. 이것은 조 종의가법(家法)이오니빨리납시도록하옵소서.” 연산 3년 3월 13일에는 간관의 책임과 의무 등에 대해 아뢰기를 "어제 하교에, ‘스스로 이기려고 한 다.’ 하셨는데, 신 등이 이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 저간관(諫官)의책임은인군과시비를다투는것입 니다. 인군이 허물이 있으면 간하여 중지시켜서 바 른 데로 돌아가게 해야 하고,일이 잘못된 것이 있으 면임금의노여움을사면서비인(批鱗)까지감히말 하여 기어이 소청을 윤허 받습니다. 만일 간관의 말 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라 하여 거절한다면 누가 감 히 천위(天威)를 거스르면서 항거하여 말하겠습니 까. 라고 하였으니 이는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 宗)이 영 명 (英明)한 임 금 이 로 되 하 려 는 일 을 위 징 (魏徵)이간하여중지시킨것과도같은충언이었다. 【당나라 태종은 신하 위징(魏徵)에게 나라를 다 스리는 원리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며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비유로 대답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태종에게 수나라가 망한 것 을 역사의 거울로 삼아 부역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 게 하며,현명한 신하를 중용하고 간언을 받아들이 도록권했다.】 그 러 나 연 산 군 은 듣 지 않 았 다 . 이 어 공 신 처 우 등 의 부당함을 아뢰기를,"작록(爵祿)은 어진 선비를 대우하는 공기(公器)이므로 인군이 어진이 와 함 께 하고 사사로이 하지 못합니다. 공신의 적장(嫡 長 )으 로 재 주 와 행 실 이 있 어 쓸 만 한 사 람 이 면 비 록 사사로운 은혜를 잘못 더하지 않더라도 자연 공 의(公議)가 있어 이미 발탁되어 여러 직위에 포열 (布列)되었고,그나머지대대로녹받는집은예절 을 지키는 이가 드물어 사치를 부리고 의를 멸하며 방탕한 것으로 덕(德)을 능멸하는 자인데, 모두 가 계(加階)를 한다면, 신 등은 어진이를 대우하는 기 구가 전부 무너져서 속초(續貂)의 비난이 이로 해 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전 해에 특별히 가자(加 資)하였고,금년에 부묘(府廟)할 때 준례에 의하여 가계(加階)를 하였는데, 지금 한 달도 못 되어 또 별도로 가계하려 하시니 작상(爵賞)의 외람됨이 이렇게까지 되면, 요행의 문이 열려 어진 이는 눈 을 내리감고 소인은 스스로 우쭐거려 국사가 날로 글러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 등이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모두말하고그칠줄을모르는것입니다. 또 내응방(內鷹坊)을 성종의 고사(故事)라 하시 니, 신 등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성종께서는 경 연(經筵)을 게을리 아니하시어 조강(朝講)·주강 (晝講)·석강(夕講), 심지어는 야대(夜對)까지 한 번도 거른 날이 없이 항상 어진 사대부들과 다스리 는 도를 강론하셨으니, 이런 아름다운 뜻을 이루 다말할수없습니다.전하께서준수하셔야할일이 한 가지만이 아닌데, 응방에 대해서만 유의하시니, 신 등 은 물 건 을 구 경 하 여 뜻 을 상 실 하 는 조 짐 이 여 기서부터 생길까 두렵습니다. 만약 삼전(三殿)의 봉양을 위해서라면 외삼패(外三牌)와 기내(畿內) 에서날로바치는공급도부족하지않습니다. 그리고 사복시(司僕寺) 관원의 차례로 천전(遷 轉)하는 것이나, 서방색(書房色)의 가계하는 일은 [대전(大典)]과 크게 저촉됩니다. 대신이 권세를 농간하여도 위에서 깨닫지 못하시며, 명기(名器) 가 혼잡하여져도 위에서 애석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교하시기를, ‘기어코 이기려 한다.’ 하심이 가하 옵니까. 옛날 그 인군을 사랑하는 자는, 인군의 잘 못이있을때신명을아끼지않고문득진술하여숨 김이 없은 후에 그만두었으므로, ‘인군을 말리는 것이 무엇이 허물이랴.’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이 기기를 좋아하려는 것이 아니고, 전하로 하여금 잘 못하시는일이없게하려는것입니다." 하니,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지금 ‘응방에 유의 한다.’ 하였는데, 응방은 조종조부터 이미 있었으 며 내가 처음 유의한 것이 아니다. 경연은 내가 편 안하면 감히 나가지 않겠느냐. 그러나 어려움을 인 군에게 책(責)하고 선한 것을 말하며 사특한 것을 막는것이니,그뜻인즉좋다."하였다. 그러나 연산은 선생의 직언에 결국 국문을 열어 죄를다스리려한다. 이에 연산 3년(1497년) 3월 23일 홍문관 부제학 이 승건(李承健) 등이 간원(諫院)을 국문함이 불가한 일임을 극론(極論)하였으나 좇지 않아 부제학 이승 건은 다시 아뢰기를, 뷺전일 경연(經筵)에서 광무기 (光武紀)를 읽다가 한흠(韓歆)이 직간(直諫)으로 죽 은 데 이르러 상(上)께서 이르기를, ‘말을 들어줄 수 없으면 버려둘 뿐이지, 어찌 죽이기까지 하느냐.’ 하 시므로 시강관(侍講官)이 동료들에게 이 말을 하니, 관중(館中)이 기뻐하면서 ‘사직의 복이다.’하였습니 다. 지금 박한주(朴漢柱) 등의 말한 것이 지나친 것 같지만,일을말하는즈음에문득명하여 국문하신다 면 전일의 하교하신 것과 서로 어그러집니다.뷻 하니, 연산군은전교하기를,"직간으로죄를입었기때문 에 이른 것이나, 이것인즉 상하가 서로 의심하는 조짐이있으니국문하지않을수없다.뷻 하였다. 다시 논계(論啓)하여 말지 않으니, 전교 하기를, 뷺대간을 국문함은 강경한 말을 듣기 싫어 서가 아니라 서로 의심하는 조짐이 중하기 때문이 다.지금너그러이용납한다하더라도어찌사피(辭 避)하는 말이 없이 보직에 나올 것이랴. 내가 경들 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만,대간이 ‘우리들의 말이 비록 잘못되더라도 어찌 우리들에게 죄를 더할 수 있으랴.’ 한다면, 용렬하고 그른 풍속을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진실로 국문하는 것이 불가함을 알지 만, 서로 의심하는 조짐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뷻 하였다.다시아뢰었으나,듣지않았다. 이에사헌부에서는 또차자를올려 다시,공신가 계가 불편함을 논하고,아울러 박한주 등을 국문하 지말것도청하였으나,좇지않았다. 이렇듯 선생의 충간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의 횡포 가점차심해지자형조정랑을거쳐외직을청하여외 직인 평해군수로 나갔으나 이곳은 늙은 부모님 계신 곳이너무멀어예천군수와바꾸어제수하게되어선 생이 비로소 군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뻐 맞이 하며 하는 말이 이 분은 전날 창녕의 태수니라. 우리 들은 이제 얻음을 얻었으니 다시 살아나지 않겠느냐 하며서로전해일러말하기를감히명을어기지아니 했다.그러나 임사홍(任士弘)등이 주축이 된 훈구파 의계책에의해김일손의사초사건을빙자하여신진 사류 제거 작업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있어 선생 은다시 압송되어 하옥하기에 이른다.연산군의 실정 을 바로 잡으려 간언을 서슴지 않았고 임사홍(任士 弘)등의간악함을탄핵하는차자(箚子)를올려훈구 파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한다.연산 4년(1498 년) 7월 27일 모진 고초와 함께 선생을 곤장 80대를 때려 먼 벽동(碧潼,평안북도의 중북부에 있는 군)으 로유배되었고,김종직문인의신진사류는봉수군(烽 燧軍)이나정로한(庭爐干)의역(役)에배정하였다. 1501년(辛酉) 10월에 부친의 부음 들으시고 남 은 의복으로 설위하여 조석으로 울부짖으며 뛰다 가기절하고다시살아남이여러번이었다.무릇상 례제도는주자님가례를쫓았다. 1504년 선생의 연세 46세에 유배지에서 다시 압 송되어 옥에 갇혔다. 때마침 김준손이 순창 귀양살 이할적에지나다가들려살아날길을스스로밝히 며 달래 말하는데 선생은 가만히 대답하지 아니하 였다.이에다시노모가계시니다시생각해보라하 지만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말씀이나 노모를 위하여 화를 면하는 뜻은 능히 자세하지 아니하니 라 하 니 김 준 손 이 말 없 이 이 별 하 고 탄 식 하 기 를 박 군이 생을 버리고 정의를 지킴은 사람이 가희 미칠 바 아니니라. 하였다. 선생은 연산 10년(1504년) 5 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凌遲)를 당 하였는데, 밤이 벌써 3경(밤11~01시)이었다. 이에 연산군은전교하기를,"죽은시체를보여도넉넉히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니,명일 백관들이 차 례로 서서 보게 하라."하였다.그러나 시신을 본 사 람들은 “한주는 탁월하고 고고(孤苦)하여 지조가 있었다.”라고조선왕조실록은적고있다. 다음날인 13일 연산군은 또다시 "박한주(朴漢 柱)의 아들들을,나이 찬 자는 죄를 주어 조잔한 고 을의 종으로 삼고, 아직 나이 차지 못한 자도 역시 조잔한 고을의 종을 삼았다가,나이 차기를 기다려 죄주라."함에 장남 봉(鳳)과 차남 란(鸞), 삼남 붕 (鵬),사남홍(鴻)등일가족이화를입었다. 중종 1년(1506년) 10월 2일 중종은 폐왕(연산 군)에 의해 화를 입은 선생과 아들에 대해 신원하 였고, 1517년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 (啓)에 의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 정에 내리시고 부인 안씨에게 숙부인에 봉하시고 자손을찾아녹용케하였다. 영조 12년(1736년)12월 10일 조정에서 좌의정 김 재로(金在魯)가 청하기를 "갑자 사화(甲子士禍)때 의 명현(明賢)인 조위(曹偉), 박한주(朴漢柱)와 임 진왜란(壬辰倭亂)때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조종도 (趙 宗道)에 게 도 시 호 를 내 려 야 하 니 기 일 을 정 하 여 전랑(銓郞)을 보내소서."하여 영조는 그대로 시행 하라전교하였으나전해지지않고있어아쉽다. 선생은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서원 (德巖書院), 청도 남강서원(南岡書院), 차산서원(車 山書院)에배향되었다.저서로는『오졸재집』이있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방엄하고 슬기롭고 굳세 며 생각이 확실하며 살핌을 꿰뚫어 보며 가만히 바 라보는 모습이 산악(山岳) 같으며 앉음이 높으며 가부가 심하지 않은 것 같으나 일을 만나면 과단성 이있어그늠름한의리는가히가로채지못하며행 함이 한결 같으며 경(敬)을 위주하고 성(誠)을 가 졌으며 어버이에의 효와 나라의 충은 확실하였다. 어릴 적부터 성리학을 돈독히 좋아하며 특히 되돌 림이 없으며 경전에 침잠하여 부지런하며 서두르 지아니하고책상에앉아책을보면밤이깊어도잠 자지 아니하고 제자백가와 산경 지치와 장자 노자 학과불교의설도또한깊이찾으며요긴한이치궁 구하기 위해 읽으며 전설과 용학은 손에서 놓지 아 니하였다. 또 언어와 동지는 한 결 같 이 예 의 에 쫓 고 비록 잠깐이라도 일찍 급한 말이 있지 아니하며 급히 그 어버이 섬김에 애경을 돈독히 하고 따스하 고 정제하여 낯빛으로 봉양함이 극진하지 아니함 이 없 고 매 일 닭 이 처 음 울 면 반 드 시 세 수 하 고 머 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여 문안하고 사처에 물러가서 는 종일토록 바로 앉아 글 읽으며 비록 가인이라도 일찍 보지 못 한 게으름이 보이면 선생이 깨끗하게 거절하며, 그 의(義)가 아니면 취하지 아니하며 그 도(道)가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며 있는 방을 따로 하지아니하며옷은몸을가리면되고집에모은재 산이없어도넉넉하게있는것같았다.일찍친구를 찾아가 문밖에 서 있으니 그 집 아이종이 보고 그 주인에게 아뢰기를 문밖에 손님이 왔는데 키를 말 하고의상을말하는데거문고끈꿰매논것같더라 하며기롱하는데그검소함이이같았다. 선생이 조정에서 위난을 당하였을 적에 간사함 을 내치고 임금을 바로잡으시려고 임금님 앞에서 말로써 간사(諫死)하실 적에 자기를 돌아보지 아 니하니 혹 멈추라고 말하기를 선생이 하는바 거의 가 자신을 보호하는 도가 아니라하며 삼가라한데 선생이 왈 “사람의 신하된 자 마땅히 써 바른 도로 임금을섬기다가또맞지않거든갈따름이니라.사 생은하늘에있나니라.어찌가히자기몸을스스로 꾀하여 임금을 불의의 땅에 바꾸리오.” 하니 듣는 사 람 부 끄 러 이 하 며 말 이 없 었 다 . 특 히 사 간 원 의 관 리로 후대에 전해지는 역사의 올바른 기록과 폭정 을 일삼는 연산의 올바른 인도를 위해 몸을 바쳤다 할 것이어서 무오(戊午)·갑자사화(甲子士禍)의 명현(名賢)으로부끄러움이없었다. 주(註)조의제문 [弔義帝文조선 성종 때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수양 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찬탈한내용을풍자한글. △ 김일손(金馹孫, 1464년 ~ 1498년 7월)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시호는문민(文愍)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 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윤필상등의부패행위도사서에기록했다. 1498년에 븮성종실록븯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 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禍)를 입었다./참고문헌:행장,조선왕조실록.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무오·갑자사화의명현(名賢) 오졸재 박한주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오졸재박한주선생이태어난차산마을전경. 선생의가계(家系) 올졸재박한주선생여포비각.경북청도군풍각면차산리178 -1. 이비각은1995년1월14일경북문화재기념물104호로지 정되었다. 비각이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는 후손 진흠(동부 비료 청도대리점 대표)을 비롯한 종원들이 각계에 선생의 사 료발굴과청원으로이루어졌다. 선생의생애(生涯) 오졸재 선생의 여포비. 비 높이 는 21 7㎝, 폭39.5㎝, 두깨 27㎝ 이다. 비문은 김응조(金應祖)가 짓고 이관징(李觀徵) 쓰고 인조 7년(1629년)세워졌다. 이같은 비석은 경남 함안군 도읍부락 뒷산에도있다. 맺음말 차산서원전경. 선생의위패가봉안된차산서원의숭인사전경. CMYK